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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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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28. 2024

(12)

창가에 어둠이 쌓여갔다. 주광색의 불빛이 창문을 스치며, 그 안쪽의 어딘가에서 흐릿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밖은 이미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였고, 그 어둠은 마치 거울처럼 안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 정희는 면접장에서 만났던 그를 떠올렸다. 반가운 재회가 아니라, 오히려 오래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가끔, 예기치 않게 그녀의 마음을 눌러왔다. 그 눌림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그녀의 숨을 빼앗아갈 정도였다. 정희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아픈 기억들이 차례로 밀려들며 그녀를 흔들었다.

정희의 모든 세포에 겹겹이 쌓여있는 그의 기억들. 그것은 삭막한 그리움과 공허함이었다. 그는 자주 너무 쉽고 무심하게, 영원히 정희 곁에 있을 것처럼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생의 끝까지 함께할 것처럼 들렸다. 정희는 한 번도 그와 헤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는 진실하다고. 하지만 '영원'이니 '마지막'이니 하는 말들은 결국 허망한 수사에 불과했다. 순간의 평온과 예측 가능한 흐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찰나의 위안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정희가 만들어낸 허상이었고, 지독한 현실로 이끌어가는 입구였다.

어제와 오늘이 분명 다르건만,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믿어왔던 착각. 삶은 늘 이렇게 진실을 숨긴다. 어제의 흔적은 오늘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서서히 지워지는 기억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유리창 너머 불확실하게 움직이는 형체들 속에서 단하나의 진실은 결국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우연히 마주한 부조리와 부당함도 사라질 것이라고 정희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면접장에서 느꼈던 긴장과 불안은 익숙했다. 하지만 그와의 우연한 재회가 가져다준 불쾌함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예고 없이 밀려오는 재앙처럼 정희를 덮쳤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 때문에 다시금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꿈을, 그녀의 삶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 그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실패 자체가 두려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불안은 서서히 그녀를 잠식했다, 마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둠처럼.

정희는 그동안 손에 닿을 수 없는 이상보다는 현실에 매달려 살아왔다. 눈앞에서 얻을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절박한 몸짓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욕망은 언제나 성공이나 행복처럼 구체적인 것들에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삶은 단순한 계산으로 풀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고, 정희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자꾸만 놓쳤다. 그 누구도 그녀가 겪는 상처와 고통이 그저 예민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버텨온 삶의 흔적이었고, 그 흔적 속에서 배어나온 깊은 고통이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던 정희는 어느새 외부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 그녀를 비껴갔다.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은 깊어졌고, 결국은 다시 혼자 남겨진 자신과 마주했다. 말로는 내뱉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면접을 앞두고 설 때마다 그녀는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제발 좋은 우연이라도 자신에게 다가오길.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결국 헛된 시도였다. 정희 앞에는 언제나 넘기 힘든 장벽이 있었다. 정희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녀의 미래는 불확실한 길 위에서 홀로 서 있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마치 부정이라도 타보라는 듯. 정희의 실패를 응원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희의 삶은 치열했다. 매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지겨운 반복이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좋아하는 취향이 있었다. 또한 그것을 향한 갈망이 희미하게나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인 삶과 이상적인 삶이 언제나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데 있었다. 두 갈래 길 앞에 서있는 사람은 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정희는 끊임없이 방황하며 길을 찾아 헤매는 삶에 익숙했다. 그렇지만 오늘 그녀가 선택한 길의 끝에 하필이면 그가 있었다.

정희는 늘 자신의 선택이 옳기를, 그리고 그것이 변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는 정희에게 가장 후회스러운 기억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의 말들 속에서 정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허공 속에서 맴돌다 이내 공허한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빛처럼, 불행은 결코 그녀의 손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은 수많은 것들이 쉽게 변하고, 쉽게 사라진다고 했지만, 왜 유독 정희에게만 불행이 반복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밤을 홀로 깨어, 그가 남긴 상처와 아픔을 되새기며,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들이 결국은 배신으로 되돌아왔음을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이해했다. 그녀의 믿음은 그저 허망한 기대였고, 그 기대는 언제나 허물어졌다. 불행은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고, 그 아래에서 정희는 무력하게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정희는 변치 않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녀를 뒤흔드는 모든 혼란스러운 물음들이 새벽안개처럼 걷힐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덧없는 기대일 뿐이라 해도.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물 위에 잠시 비친 빛처럼, 결국 사라질 운명 속에서도, 잠시라도 그녀를 지탱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정희는 때때로 생각했다. 변치 않는 영원이란, 어쩌면 도달할 수 없는 굴레를 의미하는 말이 아닐까. 그것은 존재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것. 손끝에 닿기 전에 사라져버리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영원한 것.

그 기대는 현실을 비껴가며 희미해졌고, 정희는 그 허망한 갈망을 스스로도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했다. 끝없는 방황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지탱해줄 그 무언가를, 결코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렸다. 영원은 그 자체로 그녀의 바람이었지만, 동시에 결코 닿을 수 없기에 더욱 영원한 것이었다.

정희는 가만히 자신의 숨을 들여다보았다. 얇게 퍼지는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금세 사라져 갔다. 그 순간의 반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 얇은 숨은 변함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삶이 이어지는 듯했다.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그 숨조차도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그 믿음은 때때로 그녀에게 따뜻한 벽이 되어주었다. 그 벽 안에서 그녀는 조용히 살아왔다.

불안은 언제나 파도처럼 그녀를 덮치려 했다.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밀려들었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정희는 벽 안에 자신을 가두었지만, 벽 바깥의 세상은 바람처럼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정희의 마음 역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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