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이라는 두려운 자리에서, 그는 정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길을 찾은 사람처럼. 꿈을 이룬 것인지, 그저 취업에 성공했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희와는 분명 다른 자리에 서있었다. 정희는 지금도 끝없는 취업 전쟁 속에서 허덕이며,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정희의 고통은 깊어져 갔지만,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정희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그가 남긴 상처마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정희가 간직한 상처 위로 또 다른 상처가 덧씌워졌다. 상처는 겹겹이 쌓여, 마치 늪처럼, 그녀를 깊은 수렁으로 끌어드렸다. 더 이상 표면으로 떠오를 수 없는 깊이로.
정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었을까. 그와 함께했던 시절부터, 그 후로도,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현실과 허구의 경계로 그녀를 밀어붙였을 때처럼, 지금도 그의 앞에 서게된 이유를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정희에게 남겨진 것은 오로지 그녀 혼자 감당해야 할 무게였다. 물론 과거가 현재가 얽히면 삶이 불안정해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잊혀진 시간 속에 남겨진 후회는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법이니까. 불분명한 것들 대게 유령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답을 주지 않았고, 그녀역시 묻는 방법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정희는 질문조차 할 수 없는, 끝없는 침묵 속에 갇혀가고 있었다.
정희도 한때는 꿈이 삶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세월과 함께 희미해져 갔다. 현실이 채워주지 못한 공허는 점점 깊어졌고, 그 틈은 채울 수 없을 만큼 넓어져만 갔다. 쌓여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정희는 자신이 쫓고 있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허무한 상징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꿈은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아닌, 왜곡된 환상으로 남았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언제나 그녀, 실체를 가진 자신이었으니까.
불확실성 속에서도 정희는 끝없이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답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그녀의 상처와 허무 속에서 스스로 만든 환상일 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말했다. 모호함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경계란 애초부터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가 만든 울타리 밖으로 한 걸음씩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는 어딘가에서 무심히 그녀의 걸음을 막아 세웠다. 결국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의 의미도, 그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그가 던지는 말에 의해 결정되었다.
정희는 길들여졌다. 그가 없어도 정희는 그처럼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길들이 많아질수록, 그녀는 더 자주 멈춰 서야 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망설임이 따라붙었다. 그 길의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 혹은 그런 끝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세계가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잠식해 갔다. 어느새 정희는 그 두려움은 실체로 만들어 버리고야 말았다.
매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게 맞는 걸까?' 그 질문은 끊임없이 정희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 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삶에 의미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스로 부여하지 않는 한, 그 무엇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미와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말하려 한다. 의문이 있었지만 정희도 그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누군가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려고도 했었다. 그 미세한 변주는 어딘지 어색하고 촌스러운 몸짓처럼 느껴졌다. 그런 순간마다 말투를 바꿔가며 자신을 변명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처럼,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만든 작은 반항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정희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정희는 사람들이 붙잡으려 애쓰는 의미의 덫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단순히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아닌, 선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고독과 유사했다. 고독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불러일으켰고, 정희는 때때로 자신이 경멸스러울 만큼 미웠다. 그 미움은 자신이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어 변형되고, 진정한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순간들에서 비롯되었다.
제아무리 현실과 허상을 분명히 구분하려 애써도,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해석하기 마련이었다. 정희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가 쉽게 덧씌워졌고, 그녀는 그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맞춰가고 있었다. 그 과정은 마치 부드러운 물살에 휩쓸리듯,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그건 결코 변하지 않았다. 홀로 남겨질 용기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세계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단 하나의 믿음만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정희는 더욱 현실에 집중했다. 실현 가능한 요구를 배우고 구현하는 삶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난 뒤, 마치 흙을 부수고 자라난 이파리처럼 불쑥 의문이 솟아올랐다. 인간으로서의 삶,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매끄럽게 돌아가는 기계의 한 조각처럼 존재하는 것이 과연 삶일까.
그는 그 자리에서 여유로워 보였다. 자신의 잘못을 덜어내고 그저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앞에 쪼그려야했던 그녀만이 아직도 고통에 매여 있었다. 그가 자유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동안, 정희의 삶은 마치 조여 오는 쇠사슬 속에서 끊임없이 구부려져야 했다. 정희의 마음 한구석엔 죄와 벌에 대한 오랜 믿음이 있었다. 고통이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고통 받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놓인 간극. 이것이 현실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현실이라는 말은 인지부조화를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비록 희미한 기대에 불과하더라도,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 된다. 상상의 세계, 그 속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그 세계는 자신의 인식에 통제되고 지배되는 완벽한 세상이다. 그녀가 처한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다. 꿈의 잔해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흩어져 있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모을 수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을 의미했다. 끝없이 펼쳐진 가능성의 모래사장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정희는 마음속 불안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 어떤 위로도 결국 헛된 말뿐이었다. 아무런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말들은 항상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밀어 넣을 뿐. 물론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본 사람의 조언은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듣는 사람이 자신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공허를 남길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 공간에 다른 것을 채운다는 감각이 과연 가능할까?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정희는 자신을 잃어가는 그 과정에서, 삶의 본질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 휘말렸다. 고통의 무게와 상실의 깊이를 생각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정말 성장의 과정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이 진정한 삶의 일부인지에 대한 의구심.
익숙한 손길이 정희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풀리며 방 안의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정신은 아직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깔끔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정희야, 일어나. 가게 정리해야지."
머릿속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혼탁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가게안의 공기가 전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다. 잠시 더 누워 있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조명이 커피 잔 위로 따듯하게 흘렀다. 정희는 미안한 얼굴로 가게의 마지막 손님들이 남긴 흔적들을 천천히 수거했다. 커피 머신에서 나오는 찌꺼기 냄새가 불편하게 코를 찔렀다. 익숙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낯섦이 느껴졌다. 바닥을 쓸고, 창밖을 한 번 쳐다보았다. 밤이 깊었고, 가게 외부의 불빛은 어두운 길 위로 흩어져 있었다. 누구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거리. 낮의 부산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둠 속에 남겨진 가게는 외딴 섬 같았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 문 너머가 더 이상 자신에게 열려 있지 않은 세상이었다. 정희는 잠시 멈칫 했다.
계산기 버튼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고, 그 리듬이 정희의 머릿속에 잠시 동안 메아리쳤다.
"다 됐으면 이제 퇴근해,"
그 말이 지친 하루의 끝을 알리듯, 정희는 걸음을 느릿하게 옮겨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내자,“
그 목소리 뒤에 환한 미소가 보였다. 정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지만,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가게가 텅 비는 게 싫었다. 그녀라도 가게에 있어야 될 거 같았다. 물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정희는 천천히 가게의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