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이던 강의실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파도처럼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 정희는 홀로 남은 작은 섬 같았다. 드넓은 바다 위에서 파도가 요란스럽게 춤추지만, 정희는 그 속에서 무언의 평화를 지켰다. 혼자라는 감각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정희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언제나 그들과 분리되어 있음을,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정희에게 평안함을 안겨주는 적당한 거리였다.
처음 그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스침에 불과했다.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고, 그저 지나가듯 흘러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우연은 정희의 마음속에 이상하리만치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는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화려한 외모도, 남들 시선을 끌만한 강렬함도 없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짝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은은하게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정희는 자주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도 정희를 스쳐 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완전히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서로 특별히 말을 주고받지도, 뚜렷한 시선을 나누지도 않았지만, 눈길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따스함이 흐르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오히려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아무런 과장도 없는, 마치 가벼운 잔물결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기운이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들 속에 배어 있었다.
정희도 그도 언제나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 서로를 의식하게 된 순간부터, 그 감각은 더욱 뚜렷해졌다. 짧게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말없이 스쳐가는 그 순간마다, 정희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섬을 벗어나려는 충동을 느꼈다. 그가 특별히 매력적이거나 눈에 띄는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차분한 태도와 그 속에 깃든 은근한 따스함이 정희의 닫혀 있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그가 흘러 오고 있었다.
성년의 날 행사는 해마다 반복됐다. 작년에도, 올해도, 아마 내년에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행사를 준비하는 데 진지했다. 정희는 이게 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가 가진 어른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른들은 늘 충고하고 가르치려 들었고, 무언가를 해내도 결과에 따라 지적하거나 꾸짖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어른이란 존재는 그녀에게 거만하고, 제멋대로며, 권위적이었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물론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고, 그에 따른 위치와 역할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희에게 그 어른이라는 이름은 아직 어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희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정희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있었다. 하나는 어른에게 충고를 당하는 어린애인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충고 하고 싶은 어른인 자신이었다. 정희에게는 단순한 몸의 성숙이나 법적인 지위를 얻는 것 이상인 존중이 깔려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진정한 독립으로 여겼다. 주변을 둘러보면, 항상 어른스러운 태도를 가진 친구가 있었고, 때때로 나잇값 못하고 애처럼 구는 어른도 있었다. 그 구별은 대게 배려심과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누군가와 나눈 적은 없었다. 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희는 익명의 일원으로 남아, 누군가의 성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서는 것에서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행사는 차질 없이 순서대로 잘 준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희의 관심은 언제부턴가 행사에서 그에게로 옮아가 있었다. 그도 역시 돕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물 흐르듯 조용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조율하고 있었다. 마치 깊고 어두운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장처럼. 영화 속 주인공처럼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배치하고, 결정을 내릴 순간에 주저하지 않았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 뒤에는 흔들림 없는 책임감과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
행사준비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고, 정희도 여전히 꽃다발의 꽃잎을 정리하고 있었다. 생기를 잃어가는 장미의 꽃잎을 한 장씩 떼어내는 그녀의 손끝은 조심스러웠다. 얇은 꽃잎이 지금 정희의 피로감을 대변하는 듯했다. 간혹 정리되지 않은 가시에 살짝 찔리는 짧은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이미 여러 가지 장식물과 리본이 흐트러져 있었고, 그녀의 눈은 그 어지러운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혹은 이미 지나간 무언가를 되돌리려는 무의미한 몸부림. 이 준비가 끝나야 내일이 올 수 있는 것처럼, 그 과정 속에 어쩐지 무언의 의식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정희는 이 모든 것들, 피곤하고 무거운 손끝의 감각들, 눈꺼풀에 내려앉는 피로의 무게가 다가올 어른의 세계로 통하는 어떤 작은 문을 열어주기라도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모두가 피로에 지쳐갈 무렵에도 그는 식지 않는 열기 속에서 일을 계속했다. 정희는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를 바라보자 잊고 있었던 감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제보다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어제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가까이 가서 슬쩍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다행히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텅 빈 강의실에 남아있었던 것은 그와 정희였다.
정희는 그 순간 그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호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무엇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저 그의 존재, 그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기 속 무언가가 바뀌는 듯했다. 텅 빈 강의실에서, 희미한 빛 아래 어둠 속에 묻혀가는 그의 실루엣이 정희를 향해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직 정희는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정희의 눈앞에서 부유하며, 그녀의 감정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진동하는 공기처럼 그녀의 가슴을 압도했다.
다음날, 정희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미처 사라지지 않은 잔상처럼 그가 남긴 감각이 그녀에게 은은하게 남겨져 있었다. 그것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의 숨이었다.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그 어제 느꼈던 묘한 충만함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기어이 그녀의 내부에 무언가를 남겼고, 그것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녀를 조금씩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듯 정희는 어른처럼 굴었다.
어제 밤 정희는 한층 더 연약해졌고, 그 연약함은 그가 만들어낸 온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강의실 안에 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설렜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어깨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던 그 순간, 정희는 그의 형체를 안았다.
처음이었다. 파악하기 어려만큼 큰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온몸으로 감싼 것은.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그저 흐릿하고 희미한,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이었다. 어느새 그는 물리적으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공기, 그의 존재가 뿜어내는 무언가가 그녀에게 깊숙이 닿아 있었다. 아팠고 성숙해졌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짧은 침묵 속에서, 그와의 경계는 더 이상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의도적으로 가까워졌다. 정희도 다르지 않았다. 정희는 문득 모든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같은 온도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이후 마침내 정희는 더 이상 섬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불안감보다, 그와 함께했던 자신을 내세우고 싶었다. 마치 뭔가 책임질 일이 생겨버린 듯, 그러나 그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표정도 다양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정희는 자신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고, 몸은 어느새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것은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 변화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달라진 자신이 앞으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분명히 정희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정희는 새롭게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들어왔던 섬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세상과 연결되었다. 그 연결은 물리적이지 않았다. 그의 흔적이 남겼던 따뜻함, 그 감각이 이제 정희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새로운 힘이 되었다. 그는 그녀를 조금 더 자유롭게, 그리고 조금 더 강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