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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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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15. 2024

(17)

그날 밤, 정희는 어린 시절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은 따뜻한 빛으로 물들어 익숙했지만, 동시에 적막으로 채워져 냉담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스라이 그리운 듯, 그러나 손에 닿으면 사라질 아련함이 배어 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정희는 자신이 어릴 적 아끼던 강아지를 발견했다. 먼지에 덮여 있는 작은 몸, 슬픔을 드리운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강아지가, 저 먼 기억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린 정희에게 강아지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강아지의 온기가 점차 식어가는 것을, 정희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미약한 온기와 그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이 생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차가움이 점점 다가왔을 때 그 낯선 두려움에 어린 소녀는 참 많이 울었다. 그것이 정희가 경험한 첫 번째 죽음이었다.

아빠가 말없이 강아지의 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강아지를 가져갔다. “쓰레기봉투에 버려야 해.” 그 말이 귓가에 박힐 때, 정희는 잘못된 무언가를 감지했다. 가족이었던 강아지를, 함께한 시간들을, 그 모든 것들이 쓰레기봉투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단순한 쓰레기로 처리된다는 것, 그저 몇 주 함께 지내다 사라질 존재가 아니었는데도, 아빠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규칙이고 법이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 말 앞에서 정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작은 손을 주먹 쥐고, 이윽고 풀었지만, 무기력한 어린아이의 분노만 남겨졌다. 어느새 강아지는, 그렇게 규칙에 따라 조용히 쓰레기봉투에서 사라져갔다.

죽었던 강아지가 다시 정희 앞에 나타났다. 눈가에 짙은 피로가 묻어나는 듯한, 지친 표정으로. 정희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그 작고 가벼운 몸이 그녀의 가슴에 닿자, 오래전 아득한 상처가 살며시 깨어났다. 손끝에 스치는 감촉은 낡고 흐릿해진 기억들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한때 보송보송하던 털은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오랜 기다림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자리에 있었다. 천천히,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며 눈물로 변해 흘러내렸다. 애써 묻어둔 그리움과, 쉽게 닿을 수 없는 아픔이 이렇게 다정하게 번져올 줄은 몰랐다. 정희는 온 마음을 다해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여운은 짧았다. 눈을 뜨는 순간, 정희는 현실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왔다. 머리맡에 남아있는 꿈의 잔상이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방 안이 온통 낯설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손끝에는 이미 사라진, 강아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꿈속에서 안았던 감촉이 잊히지 않았다. 한 줌 따뜻한 잿더미를 품었던 여운이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정희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아직 떠나지 않은 채, 문득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리움이 어둠 속에서 아련히 떠올랐다. 꿈속의 강아지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이토록 지쳐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가가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밀려드는 허무와, 고개 숙인 채 무거워지는 마음을 다독일 수도 없었다.

다시 잠들기를 원했지만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리운 감정은 현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빠가 떠올랐다. 감정을 누르던 사람. 말을 하지 않아도 긴장감을 만드는 사람. 정희는 기어이 쓰레기봉투에 강아지를 집어넣었던 아버지의 덤덤한 눈빛이 또렷했다. 그 눈빛은 그의 눈빛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그에게 그때의 꿈을 이야기 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무심하게 그것을 단순한 착각이나 환상이라고 말했다. 아직 어린티를 못 벗어난 거라고.

하지만 정희에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정희가 겪었던 아빠에게서 버려진 그 강아지의 죽임이 상처도 돌아왔다. 강아지처럼 자신도 언젠가 버려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어딘가 불안정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면 정희는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곤 했다. 그는 정희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아빠를 닮았다. 언제든 감정 없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

가슴 한구석에 쇳덩이가 얹힌 듯 답답했다. 그가 현재 정희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것이.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때때로 건네는 따스한 위로는 정희를 그의 세계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정희는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마치 족쇄에 묶인 채 춤을 추는 것처럼, 그와의 관계는 지속될수록 정희를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어갔다. 그가 떠나면 고독과 공허함이 그녀를 덮쳤다. 그가 없을 때 캄캄한 밤처럼 그녀는 방향을 찾기 어려워했다. 마치 무능력한 아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체온이 주는 안정감이 절실해졌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그녀는 점점 더 그의 그림자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정희는 자신을 잃어갔다. 그것은 불안이라는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의존이 커질수록 그녀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희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두렵고 낯설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 그녀는 더욱 더 그에게 매달렸다. 불안과 두려움이야말로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희는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려는 욕망과, 그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녀를 갈라놓았다. 모순적인 감정이었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찾아가는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복잡하게 얽혀버린 실타래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그녀는 더욱더 그 안에 엉켜버리는 기분이었다. 사랑의 무게는 그녀를 강력하게 짓누르면서,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정의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정희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두 개의 색이 섞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습. 어떤 오해나 오류가 없는 완벽한 일체. 그래서 그는 반드시 자신과 같아져야 했다. 정희에게 사랑이란 각자의 차이를 줄여가며 서로를 포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믿음.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결합하여 하나의 더 큰 개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사랑은 조화와 일치의 결과여야만 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은 그녀가 자신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정희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의 사랑이 의심스러워졌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다르다면 어떻게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지 정희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이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관심 없는 무심한 그의 목소리였다. 그는 친절하게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부드럽지만 강압적이었다. 어린 시절 아빠처럼 가르치고 자신은 배워야하는 관계. 결국 정희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감이 무너졌고 아프기까지 했다. 어느새 정희의 사랑은 그가 정해놓은 틀 속에 가두어졌다. 정희가 그 틀에서 벗어나려하면 처절한 싸움이 되었다. 그것은 옳지 못한 정희의 완벽한 패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는데도, 겉으로는 더욱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럴수록 그에게서 더 많은 요구들이 정희에게 제시되었다. 너무나 일방적이어서 모욕적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희는 거부하지 않고 따랐다. 그의 요구는 늘 결과가 좋았다. 남들 보이게 좋은 모양이었고 그럴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인위적이었지만 내세우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책임과 존중은 정희의 양보와 인내로 바뀌었다. 이 관계는 더욱 강하게 고정되어 이후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자주 정희의 태도를 지적했고 충고했다. 마치 연출자가 배우를 탓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철없는 말, 어리석은 생각, 그리고 부족한 이해력—그는 그렇게 그녀를 몰아갔다.

정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잔뜩 긴장했고, 그의 지적에 맞춰 행동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점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 법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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