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별다를 것 없었다. 정희는 밥상을 차리고 그의 발소리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문이 열렸다. 현관에서 밀려든 차가운 공기가 정희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문턱을 넘으며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조하게 “미안, 늦었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무심한 얼굴, 사소한 미안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태도는 정희의 마음을 질식시키듯 무겁게 눌렀다. 연락도 없이 늦은 데다,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사이 식어가는 음식을 바라보며 정희는 차가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정희는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가 자신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한 발 물러서 있듯 무심하게 건넨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흩어뜨렸다. 식탁 위, 가지런히 놓인 음식은 마치 꺼내진 내장의 무게처럼 선명하게 그녀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걸음을 늦추었던 자신이, 순간적으로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가 이 순간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참기 어려웠다. 그는 집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정희를 바라보지 않았다. 사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만으로 연결된 이 관계는 이제 불확실한 미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굳이 정희가 그를 위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의 곁에서 조용히 자신을 낮추는 일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보여준 태도가 정희의 마음속에서 그에 대한 마음을 식게 했다. 배려를 무시로 돌려보낸 건 바로 그였다. 그것만큼 큰 배신은 없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정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지나치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정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불편함이 묻어났다. "왜 전화 안 했어?" 그 한마디는 애써 가라앉히려던 안도와 불안을 억누른 채 흘러나왔다.
"친구들이랑 있었어,"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대수롭지 않은 듯이 건조하게 던져졌다. 익숙한 무심함, 그녀의 존재를 가볍게 밀어내는 태도. 정희는 그가 애써 자신을 멀리 두려는 듯한 거리감을 느꼈다. 아마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는 위장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녀에게는 잔혹하게 다가왔다. 마치 부엌 한편에서 끓어 넘치는 국물처럼, 속 깊이 눌러 두었던 불만과 서운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희가 공들여 쌓아올린 일상의 온기를, 그는 단숨에 차가운 손길로 밀어냈다.
정희의 시선이 다시금 식탁에 머물렀다.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깊게 내려앉았다. 시간을 들여 준비한 정성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그 차가운 음식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를 위한 마음이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다니. 차가운 음식, 차가운 시선. 정희는 숨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딱딱해졌다. 눈앞의 밥상은 이제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자신이 그를 위해 쌓아 올린 마음의 잔해로 비쳤다.
그는 미안한 감정보다 정희를 향해 쌓인 불만을 말없이 품고 있는 듯했다. 그의 표정 너머로 그가 결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한 번도 위로의 말로 다가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반응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시당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최소한 무시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정희의 감정들은 조용히 발화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픔을 남겼고, 그 상처는 이제 전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정희의 감정들은 조용히 발화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픔을 남겼고, 그 상처는 이제 전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마음속에는 갈망과 증오가 뒤엉킨 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정희는 폭풍처럼 그를 향해 휘몰아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를 향한 차가운 분노의 눈길을 마주하면서야 비로소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상처의 이유를 밝혀야, 앞으로의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언제나 인내심이 부족했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결국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 조급한 말들 속에서, 그는 정희에게 차가운 명분을 던졌다. “넌 항상 나만 탓하잖아. 왜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 내가 밥을 해달라고 했어? 우리가 밥 먹기로 약속이라도 했냐고? 난 밥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야. 그걸 벌써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의 말은, 이 모든 상황의 책임이 정희에게 있다는 듯 냉정하게 내려앉았다. 정희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의 말투엔 정희라는 존재의 무게를 철저히 외면하고자 하는, 감춰지지 않는 차가운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정희가 자신을 위해 쌓아온 작은 노력들, 그녀가 애써 쥐고 있던 감정들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그녀가 품었던 수많은 갈등과 참아왔던 말들은 그의 무심한 언어 속에서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정희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깊게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는 소리로,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변해버린 틈새였다.
정희가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때, 그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예상치 못한 충격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팔을 타고 번지는 고통에 정희는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손아귀는 점점 더 강하게 그녀를 옭아맸다. "어디 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위협은 무서웠다.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은 분노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정희는 그 순간, 자신이 떠나려는 발걸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정희의 몸은 차갑게 굳어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마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고, 수없이 교차하는 생각들이 산산조각 났다. 그 혼란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두려움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심장은 차오르는 공포에 급격히 뛰기 시작했고, 숨조차 막히는 듯했다. 그럴수록 정희는 더 강하게 저항했다. "놔… 네까짓 게 뭔데 날 잡아! 놔! 놓으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피부의 차가움은 그보다 더 불쾌했다. 그의 손길은 그녀의 몸에 더 깊이 박히며, 뿌리칠수록 더욱 거칠어졌다.
그의 힘에 이끌리며 정희는 비틀거렸고, 중심을 잃은 몸이 바닥에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너, 지금 나한테 너라고 했어? 내가니 친구냐?" 그는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숨결을 그녀의 얼굴에 내뱉었다. "왜 이렇게 예민해? 말 좀 들어!"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다. 그 순간, 정희의 숨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가 갑작스레 그녀를 벽으로 밀쳤을 때,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닿는 감각이 소름 돋게 차가웠다. 정희는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를 막고 있었고, 그녀는 덫에 걸린 사냥감이 되어갔다.
정희의 시야는 흐릿해졌고, 손끝은 떨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힘을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차갑고 무심한, 그 눈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정희는 아무리 소리치고 몸부림쳐도 이 공간에서 자신을 구해줄 이는 없으리라는 절망감에 빠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공포가 점점 더 강하게 그녀의 숨통을 조여 왔다.
정희는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거의 속삭이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발… 그만해." 그녀의 목소리는 금세 눈물에 묻혔다. 하지만 그 말은 벽에 부딪힌 파도처럼 아무 소리 없이 흩어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절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단단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정희와 그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정희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는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정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힘도, 말의 필요도 사라진 듯했다. 다만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들이 눈물로 배어나왔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멍해져 있었다.
그 역시 점점 이성을 찾는 듯했다. 그의 분노로 가득 찼던 눈빛이 서서히 또렷해졌고, 손목을 움켜쥐었던 손아귀의 힘도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녀를 꽉 쥐고 있지 않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느슨해지자, 정희는 그에게서 자신을 밀어내려 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미약했지만, 그의 몸도 그에 반응하듯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온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팔목은 저릿했고, 그가 밀쳤을 때 부딪힌 등과 어깨는 은근히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신체적 고통보다도, 정희의 가슴 속에서 울리는 깊은 무력감이 더 무거웠다. 그녀는 오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 고통을 그대로 견뎌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다쳤는지도 알지 못했다. 상처는 예상보다 깊고 심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감정은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흘렸다.
그의 의욕이 사그라지자 둘 사이의 공간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의 손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정희는 시선을 걱정하면서도, 이제는 그와 눈빛을 마주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 말을 꺼낼 듯했지만, 결국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그 순간, 정희는 그가 할 말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자신을 깨달았다.
정희는 조용히 가방을 집어 들었다. 팔목에 남은 흔적이 여전히 쓰렸지만, 그 고통마저 무뎌질 만큼 마음은 깊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다. 차갑게 바깥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그 공기가 오히려 정희에게는 차분한 이탈처럼 느껴졌다.
그때,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그녀를 겨누었다. "야, 맘대로 해. 씨발. 내가 밥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무시한건 너지 내가 아니야."
그 말은 순간 가시처럼 그녀의 마음에 박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 속에 담긴 힘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감각으로 찾아왔다. 그토록 강하게 밀어붙이던 그의 말과 행동이,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가시처럼 찌르던 그의 목소리마저, 이미 그녀 안에서는 공허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리자, 정희는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차갑게 식어버린 채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을 만큼 삭아가는 기억들이었다. 썩어가는 음식처럼, 어디엔가 버려야 했지만, 그 기억들이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는 불편함이 마음을 괴롭혔다.
버릴 수 있는 것조차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기억들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돌며, 그녀의 발목을 마음껏 잡아챘다. 정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조차도 길게 느껴졌다.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빠르게 확인해야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정희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단호하게, 그리고 더는 미련 없이, 그의 영향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