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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엄마, 어떤 아내이기전에

'나'로 살 수 있어야 함을..

by 제이쌤

내 첫 번째 딸은 아가여도, 어려도 내 영혼의 메이트 같았다.

사실 소울 메이트 같은 남편과 잘 통하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슬프게도 이미 결혼 2,3년 차에 그렇지 못할 거 같은 예감도 했었던 거 같다.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한 채로 한 결혼은 나도, 남편도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불협화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감히 이혼이라는 걸 할 엄두조차내지 못했기에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거다, 사는 게 별거냐 생각하며 살다가 만난 '딸 '이라는 존재였다.

남편에게 채우지 못하는 대화의 공허함을 나는 딸과 함께했고, 그 공허함은 점점 더 딸을 잘 키우는 일에 몰두하게 했다.

나는 대화가 중요함 사람임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아이에게 기울어진 가정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또 이 아이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안 생기는 동생을 갖기 위해 병원까지 다녔고, 그렇게 나에게는 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두 명이나 더 생겼다.

엄마 한 명이 세 유아를 돌보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처음 혼자 외출을 했던 가을날은 유독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새빨갛고 샛노란 가을을 바라보다 눈물이 났던 건 앞으로 견뎌야 할 책임감의 무게도, 그 길에도 바깥일이 너무 중요한 남편은 자주 옆에 있지 않을 것임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길들에 는 역시나 두말할 것 없이 이를 악물어야 할 일들이 널려있었다. 독한 책임감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은 날들이었으나, 나는 그냥도 말고, 그 세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발버둥 쳤다.

어느 드라마에선가 꽃이 아닌 불꽃으로 살다가겠다는 대사에 마음을 뺏긴 적이 있다.

나는 꽃으로 살고 싶었을까. 왜 그 말이 그리도 아팠는지 모르겠다. 꽃으로 살기엔 세 아이를 키우며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고, 긴장을 놓을 수도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불꽃처럼 매일을 다 태우고 살다가 번아웃을 호되게 앓았다.

남편에게 원망이 쏟아졌고,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는 나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혼란이었으리라.

그러나 기꺼이 나는 그 혼란의 강을 건넜고, 씩씩하게 나를 찾아냈다. 아이들만 바라보던 내 시선을 거두고, 이제는 나를 바라본다. 가끔 바쁜 엄마를 서운해하는 아이들의 투정이 지금도 낯설지만, 엄마의 빈 공간은 아이들 스스로 채워갈 것을 믿어보려 한다.

나의 혼란에 더 혼란스러워했던 남편과 나는 모두 미숙한 어른이었다. 나는 나를 찾는 중이라고 어른스럽게 말하지 못했으며, 그 역시 현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해체되어 살아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놓아버려야 하나 생각하던 때에..
남편이 병에 걸렸다.

아이들 없이 둘이 하는 여행도, 외출도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남편이 아프고 3개월쯤이 되던 지난 주말에 우리는 둘이 여행길에도 올랐다.

도와주지 않았다고 원망했으나 어쨌든 우리가 세상에 내놓은 이 아이들은 어느새 모두 내 키만큼 훌쩍 커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썼으나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애쓴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이제야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든다.

어떤 아내로, 어떤 엄마로보다 우선 '나'로 살 수 있어야 비틀리지 않은 마음으로 좋은 엄마, 좋은 아내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혼란을 건너 우리 가족 모두는 그런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꽃보다 불꽃으로 살다가고싶다. 누군가는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게 나다. 어떤 부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매일을 살아야 살아있음을 느끼는 지금을 그냥 사는 거다.

마음껏 불꽃으로 살다가 그저 들판에 핀 들꽃으로 살고 싶은 날이 오거든, 또 나는 미련 없이 꽃도 되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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