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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Aug 21. 2020

사막을 건너는 사람들

photo by Arif Ibrahim

나는 지도를 보면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 생텍쥐페리, <사막의 죄수>


사막을 건너는 사람들은 조용히 길을 안내하는 사막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며 황량함 위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내면의 정체성을 찾는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삶과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지 실존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진실의 사막’을 걷는다. 그토록 거대한 황야에서 내가 존재하는 세상은 오직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뿐이다. 여러 생각에 끄달리지 않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이 순간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산다는 건 초극의 힘으로 인생의 사막을 건너는 일이다. 여행의 행로는 무척이나 길고 험란하며, 때때로 죽음과도 같은 고독이 밀려온다. 고통과 극도의 피로가 더해져 이것이 영혼 속에 끝없이 계속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엄습한다. 긴 여정길에서 종종 길을 잃어 허우적거리고, 때로는 신기루를 좇아 헤맨다. 적막한 고요 속에 외로움이 바오밥나무의 뿌리처럼 영혼을 파고들 때면 차라리 모래알처럼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고 싶다.


무엇이 인생인가? 밤하늘에 반짝 빛을 발하는
개똥벌레에 불과하지 않은가.
겨울날 들소의 한 줄기 입김에 불과하지 않은가.
풀 위에 누웠다가 해가 기울면 따라서 사라지는
작은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 아킬 모저, <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이 광활하고 텅 빈 사막을 다 건너면 무엇이 남을까? 늙고 지친 몸뚱이가 남을 뿐이다. 체험의 여운과 약간의 통찰과 함께. 그 누구도 사막을 정복할 수 없고 종국에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사라진다. 소멸의 시점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누구나 끝을 향해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히파니스 강변에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작은 동물들이 있는데, 아침 여덟 시에 죽으면 청춘에 죽는 것이고 오후 다섯 시에 죽으면 노후에 죽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도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그런 것이다. 한낱 꿈처럼 헛되고 허무한 것이다. 삶이란 영원 같은 찰나의 역설인 셈이다.


그럼에도 운명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고난이 찾아오면 그건 절대 정탐하듯 혼자 오지 않는다. 고난은 무리 지어 움직이니까...“ 라는 시 구절이 있다.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오면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그저 고통에 지나갈 때까지 침묵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일단 사막의 행군이 시작되면 누구도 돌아나갈 수 없다. 길을 떠나고 모래언덕을 끝없이 걷고 황량함 속에서 절망에 맞서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고독 속에서 버둥거리지 않고, 사막의 끝없음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한계와 고통을 조용히 관조하면서. 사막은 내면을 투영하면서 작고 미약한 인간의 유한성과 오만함을 일깨우며 겸허한 성찰로 이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메마르고 건조한 모래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면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추위가 반복되지만, 가끔은 샘이 흐르고 초목이 자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된다. 목을 축이고 뜨거운 햇볕과 매서운 사막의 모래 바람에 다친 마음을 쉬게 하면서 마음의 갈증을 씻는다. 고대 바다였을 방대한 모래알의 사막은 온 우주로부터 바다를 불러들이는 거대한 삶의 이력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의 사막을 건너는 법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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