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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Sep 16. 2020

'무'의 매혹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쯤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따라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 장 그르니에, <섬>


철학자의 인식은 뭔가 남다른 모양이다. 장 그르니에는 예닐곱 살에 ‘무’의 자유를 처음 경험하며 존재 인식에 있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에게 붙어 다닌다. 아무리 논리를 동원해도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안갯속 같은 존재 의식 세계를 헤매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때 비로소 ‘무’라는 철학적 통찰에 이른다고 한다.


그제야 안개가 걷히고 불안에서 벗어나 무한 속에서 존재가 해방되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생을 인식하며 확장된 존재로서 인간은 비로소 우주와 하나가 된다.


저 똥구멍에서 창백한 빛이 새어나와
우주의 내장들을 가득 채우는구나!
무한의 저 똥구멍을 향하여, 전진!
- 밀란 쿤데라, <느림>


인생은 어딘가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이라는 무한궤도를 뱅뱅 도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느릿느릿 영원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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