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건
인간의 권리예요.”
- 미야시타 요이치, <11월 28일, 조력자살>
안락사Euthanasia는 ‘좋은 죽음’이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안락사는 좋은 죽음일까?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자연사가 가장 좋은 죽음인가? 자연적인 죽음이란 게 가능한가? 노인의 죽음이란 게 연소하는 양초처럼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노환으로 인한 죽음조차 그 자신에게는 결코 자연적일 수 없다.
정영수의 소설 <더 인간적인 말>에서 이모 이연자는 안락사 즉 조력자살을 택한다. ‘우울증 때문도’ 아니고 ‘외로워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죽음의 범위'인가? ‘생명의 존엄성'은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보다 우월한 도덕적 명제인가? 어떻게 죽을지는 삶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그걸 선택할 권리는 정당한가? 이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마치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때처럼
마음속이 고요해진 가운데 준비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사회적으로 버림받거나 배반당한 사람에게 삶이란 의미 없고 지리멸렬한 지속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자 장켈레비치의 말처럼, 모든 불평등 사이에서 거대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죽음뿐이라는 비극 말이다.
카뮈에 의하면, 자살이란 삶의 무의미를 통절히 느끼며 그저 바득바득 애써 살 보람이 없다는 고백이다. 삶의 무의미성이 바로 삶의 의미이며, 의미의 허무주의에서 희망을 주입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고약한 운명 아닐까.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끝없이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면서.
우리가 떼는 모든 발걸음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행보다. 우리가 품은 모든 상념은
결국 죽음에서 깨어진다. 죽음의 완전히
공허한 진리, 그 비현실적인 현실성은
우리 인생이 가지는 무의미함의 완성이다.
무로 넘어가면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는 곧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모두의 삶은 각자의 심오한 신비다. 그 삶은 반드시 존엄한 죽음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죽음은 누가 대신할 수 없고 누구나 자기만의 죽음을 홀로 맞아야 한다. 인간은 의식하는 존재다. 죽음을 사유하면서 정확히 인식한다면, 어떤 죽음은 철학적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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