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마지막 학번에게는 대학 졸업이 더 이상 취업을 의미하지 않았다. 나름 큰 꿈을 품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전혀 무관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체대를 졸업한 친구는 정수기 영업을 다녔으며, 경제학과를 졸업한 친구는 제약회사에 취직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사회로 밀려난 친구들은 취업, 대학원, 알바, 임시직 그 중간쯤 어딘가에서 모두들 헤매고 있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복잡하고, 심란한, 서울의 모든 것들을 무책임하게 뒤로 한 채, 나 홀로, 석사 학위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도망치듯 떠나갔다. 막연하긴 했지만 2년간의 대학원 학위가 나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바꿔 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20대 후반. 뉴욕으로 대학원 유학을 떠났다."
뉴욕은 내가 선택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였고, 당연히 안락한 처마 밑이 되어주었다. 쉴 새 없이 공부하면서 도시 곳곳을 누비며 경험하였다. 뉴요커들처럼 공원에 앉아 햇볕을 쬐며 독서를 하고, 그들처럼 양키즈의 팬이 되고 Off Broadway 공연을 보러 다녔다.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손사래 치며 피했다. 그렇게 '진짜' 뉴요커의 흉내를 내며 나도 관광객들 눈에는 뉴요커로 보이리라 착각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20대의 눈에 비친 뉴욕의 모습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하루에 하나의 Avenue 씩 종단해 보기도 하고, 다른 Street을 따라 횡단해 보기도 하였다. 블록마다 전환되는 분위기에 설레고, 나만 알게 된 새로운 장소들을 발견하면 가슴이 뛰었다. 늦가을이면 NFL과 NBA가 개막하고, 봄이 오면 MLB와 NCAA에 열광했다. 어떤 동네의 바에 들어가도, 모든 종류의 경기가 라이브로 나오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공연들은 뉴욕으로 몰려들었고, 카네기홀과 링컨센터는 늘 최고의 상시 공연 프로그램들로 가득했다. 돈을 들이지 않아도 공원에는 갖가지 버스킹들이 가득했고, 거리의 아티스트들은 나의 예술적 기대치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준의 공연들을 선물해 주었다. 센트럴파크, 브라이언트 파크, 워싱턴스퀘어 파크, 메디슨 파크. 책 한 권 들고 공원에만 앉아있어도 하루가 모자를 만큼, 시간을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없이 경험하고, 즐거움을 찾기에 뉴욕만큼 완벽한 도시는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사람에게, 뉴욕만큼 완벽한 도시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참 이기적이다. 아니, 편안함을 느끼면 무섭게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에 몰두한다."
그 시기의 나는, 2년간의 유학생활 내내, 내가 이 도시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으려 몰두하였다. 이유는 수만 가지였다. 난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뉴욕에서의 나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하였으며, 졸업 직전에 Job Offer를 받기도 하였다. 마음만 모질게 먹었다면, 지금의 나는 뉴욕의 평범한 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참 여리다. 아니,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내팽겨 칠 정도로 차갑지 못하다.
여자 친구는 한결같이 서울에서 나와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7년을 넘게 만나온 그녀에게, 내가 왜 이곳에 남아서 살아남아야 하는지, 설명할 수 조차 없었다. 집안의 가장이셨던 나의 어머니는 장남인 내가 돌아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 가족은 이제 아무 걱정이 없어진다며 기대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두 여자들을 매몰차게 져버리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갈 만한 욕심과 냉정함과 야망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뉴욕을 포기했다.
모두가 나의 귀국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겠지만, 난 수많은 밤을 고민으로 잠 못 이루며 고민하였다. 치열한 고민들로 위경련까지 앓아가며, 굳은 마음을 먹고 뉴욕을 "포기" 하고 서울을 "선택"했다. 좋은 감정을 간직한 채,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연인처럼, 난 늘 뉴욕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잠시 헤어질 줄 알았던 뉴욕에는 10년이 넘도록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뉴욕으로 출장을 갈 일 들이 생겨나며, 자연스럽게 그리워하던 도시와 재회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재회였건만, 정작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나를 휘감고 있는 감정은 이질감이었다. 난 결국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이방인이며, 곧 돌아가야 한다. "다음 주에는 유니온스퀘어에 나가 장을 봐야겠다."처럼 아무 일도 아니었던 일상도 가능하지 않았다. 타이트하게 짜인 일정에 따라 회의를 마치고 나면 하루가 저물었고, 정신없는 일정이 마무리되었을 즈음, 난 다시 서울로 떠나는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40대가 되어 다시 만난 뉴욕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마초가 합법화되며 온 거리는 꼬릿한 연기와 매연들이 뒤엉켜 있었다. 코로나를 지나오며 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들은 일부거리를 점령하고 있어 '걷기 좋은 도시' 맨해튼은 오래전 얘기이다. 여전히 뉴욕은 두 팔 벌려 나를 반기는 것 같았지만, 행색은 초라해지고 안색은 지는 노을처럼 바래가고 있었다.
뉴욕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30대의 삶에 몰두하며, 나의 모든 것들은 이미 지난 15년간 서울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부모님을 먼저 떠나보내드렸고, 새로운 부모님과 두 명의 자녀가 생겼다.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짬을 내어 운동을 한다. 가족들과 강원도로 여행을 가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 탐험한다. 각자 가정이 생기며 멀어진 친구들의 자리에는 챙겨야 할 가족들과 행사들이 채워졌다. 강남역으로 출근하고 광화문과 여의도로 외근을 다닌다. 상암동에도 안부를 살펴볼 동료들이 있고, 연남동에도 마음 쓰이는 가족이 있다.
이제, 내 생활 그리고 마음속 어디에도, 워싱턴스퀘어와 블리커 스트리트, 유니온스퀘어와 이스트 빌리지, 어퍼 웨스트와 센트럴파크는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한참을 그리워하다 다시 만난 연인이 결국 해피엔딩을 맞지 못하고 권태로움에 사로잡혀 다시 헤어지듯 나는 그렇게 추억 속 나의 소중한 뉴욕과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