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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Jan 30. 2021

손을 맞잡기 어려울 그즘엔

나는 누구일까요



  살을 깎아 나를 다듬는다. 날렵함은 부지런함의 결과물이다. 베일듯한 시선 끝에 만족스러운 한 획이 완성된다. 야속하게 시대는 흐르고, 또 다른 해가 뜬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나의 자세가 뭉뚝해지는 순간 고리타분함이라는 이름으로 내쳐진다. 그러니 다듬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집 있고 느리고 불편하다고. 어쩌면 재빠른 변화와 센시티브한 외면을 바라는 이들에겐 틀림없는 통찰이다. 새로운 평가의 기준을 내밀 수 있는 자들이 생겨나는 시간 동안, 나 또한 몸을 꼿꼿이 만들어 뾰족해지려 노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가를 알아주는 자들 또한 늘어난다. 나의 뚝심을 알아주는 자들이 있다. 각진 듯 하지만 부드러운 외면을 고집하고. 겉은 단단한 갑옷 마냥 곧은 나무 같지만 그 속은 여리고도 새카맣게 타버린 가루임을 안다. 나와 함께하는 이들은 썩 부지런하다. 아무리 철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래 함께하면 뭉뚝해지는 법이다. 이는 서로의 시간이 굵어짐에 따라 더욱 부드럽고 진해지기 마련이다. 


  사각사각. 나의 매력을 알아주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구가 있다. 첨예함은 칼날의 날카로움으로 유지된다. 그의 자세와 도구의 모양새는 다를지언정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습은 일정하다. 연한 내면을 깎아 더 날렵하고 차갑게 보이도록. 그렇게 둥글고 날이 선 모습을 반복하다 보면 애석하게도 나의 수명은 눈에 훤히 보이고 만다. 손을 맞잡기 어려울 그즘엔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는 증거이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떨어질지언정 그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뒤로 떨어져도 괜찮다. 두툼하고 탄성 있는 고무 물체는 나를 안정감 있게 받쳐준다. 그는 나의 실수를 감춰준다. 그가 있기에 두렵지 않다. 실수를 지울 수 있는 능력 자체로 나는 용기를 얻는다. 아이들의 시작을 함께하는 일이 많다. 손에 힘을 어느정도 주어야 적절한지 학습한다. 그들에게는 나의 뭉뚝함과 첨예함, 그리고 실수를 모두 드러내고 만다. 


  불편함의 미학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고리타분하고 확고한 철학에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다. 오늘도 몸을 꼿꼿이 세워 세상에 한 획을 그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애초에 뾰족한 자들은 뭉뚝함이 주는 부드러움을 알 수 없다. 늘 같은 모습인 자들은 변화하는 모습의 숭고함을 알 수 없다. 단단한 외면이 부드러운 내면을 감싸는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아삭한 촉감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나와 함께할 가치가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 내 이름은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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