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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Sep 12. 2021

잔뜩 흐트러진 것들이 나를 기쁘게 한다

나는 누구일까요


  뒤척임이 많았던 밤이었다. 잔뜩 흐트러진 것들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것들은 곧 내가 곱게, 부드럽게, 가지런하게 만들어야 할 일들이다. 


  그와 내가 함께한 지 벌써 3년. 첫 만남은 스치는 시간이 그리 길지 못했다. 짧은 순간이 다섯 번 정도 반복되는 일이 전부였다. 하루가 더해질수록 내가 담당하는 그의 일도 늘었다. 정확히는 일의 길이가 길어졌다. 너무도 미세해서 마치 문득 보니 깎아야 할 때가 다가온 손톱 같은 속도였다. 그렇게 3년이 흐르니 눈썹 끝에 있던 그의 향기가 어깨춤까지 닿았다.


  그는 아픈 걸 싫어했다. 그래서 날 찾아왔다. 나의 푹신한 성격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일이 제멋대로 엉킬 때마다 나를 찾아왔고, 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풀어나갔다. 그럼에도 순간 욱신한 고통이 그를 괴롭힐 땐 일의 높낮이를 조절해서 문제점을 찾아보았다. 나는 비교적 꼼꼼한 성격이라, 그 꼼꼼함에 그의 일들이 자주 걸리곤 했다. 그래도 꼼꼼함의 장점이 뭐냐, 한번 일을 마치고 나면 잔실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그런 점을 높이 샀다. 마음까지 곧아지는 쾌감이 있다고 했다. 


  나의 임무는 곧게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가 원하는 모양새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매번 마음 같지 않다. 늘 적당히, 최선을 다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결과도 다른 법이다. 그의 일의 모양새가 오늘따라 바닥에 흘려버린 마른국수같이 날렸다. 아... 망했다. 괜히 또 나한테 화풀이를 한다.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네가 해보시지!'라는 말로 반항하고 싶다. 그 순간 그가 본인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 이리저리 일을 해보더니 한숨을 뱉는다. 참나. 역시 매번 시키기만 하는 사람은 이유가 있다. 그는 꼭 제멋대로 안되면 샤워를 한다. 나도 그걸 바라는 바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모든 일은 해결된다. 


  세 시간 전 나간 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금 달라져 보인다. 그의 성격도 달라 보인다. 그는 곧고 반듯한 사람. 둥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오늘은 아니었다. 뭐랄까.. 동그랗게 꼬였다. 어색하게 둥글다. 찰랑이던 향기마저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 퉁겁고 네모에 가까운 내 몸집보다 동그랗고 부드러운 곡선형을 뽐냈다. 마치 그의 달라진 모습처럼. 


  그날부로 나는 해고되었다. 예고 없이 그는 일의 스타일을 바꿔버렸고, 내가 억지로 일을 하는 순간 그가 큰 결심을 하고 바꾼 일들이 무너져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비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갈 곳이 없어 그가 억지로 끼워 맞추는 저 둥글고 가식적인 모양새가 언제 풀어질지 기다린다. 그의 본래 모습을 잘 안다. 그도 내가 가장 자신과 닮았다는 걸 알 거다. 언젠간.



"그래, 내 이름은 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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