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제 Feb 05. 2022

갑자기 민소희처럼 달라질 수 없지만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



그런 말이 있다. 나이 먹으면 다 변한다는 말. 사실 이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실제로 회 한 점 먹지 못하던 내가 이제는 겨울마다 회를 찾고, 맥주는 절대 못 마시겠다며 소개팅 자리에서도 소주를 마시던 20대 초반과 달리 지금은 맥주만 먹었다 하면 2000cc씩 들이키니까 말이다. 이 명제는 식성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고 하얗고 쌍꺼풀이 없는 강아지 상에 뭐 손이 예쁘고 어쩌고 했던 반휘혈 이상형은 어느 순간 다정하고 센스 있고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으로 변했다. 또 친구에 죽고 못살았던 전과는 달리 이제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웬만한 일에는 잘 발끈하지 않고, 그냥 체념하며 덜 지랄하며 산다. 나열하자면 더 많겠지만 나는 이만큼이나 변했다. 


또 물론 이런 말도 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이 말도 맞다. 왜냐하면 나는 애기 때부터 지금까지 오이와 버섯을 못 먹고, 초등학교 때 입문했던 온갖 내장들과 닭발을 여전히 사랑하며 우유 들어간 커피는 선호하지 않는다. 또 허세 넘치고 예의 없는 사람들을 혐오하며 의리 없는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친구에 죽고 못 살진 않지만 항상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무슨 버튼이라도 눌린 듯이 발끈하지는 않지만 눈치 없는 척, 잘 모르는 척하며 신랄하게 구는 데는 도가 텄다. 앞에 나서서 지랄하는 것도 용기이고 체력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건가. 문득 궁금해진다. 둘 중 어떤 명제가 맞는 걸까. 변한 사람들이 많을까 여전한 사람들이 많을까. 사실 변화는 정말 양날의 검이라서 일단 시작하면 무조건 득이 되거나 흠이 되거나 하는 것 같다. 너 좀 변했다?라는 말속에는 많은 저의가 담기곤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사실, 변화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인 것 같다. 


변하지 않는 속성에 대해서는 찬양하는 시도 있지 않나. 윤선도의 시조 오우가를 보면 바위, 대나무, 달, 소나무, 물을 본인 친구라 칭하며 변하지 않고 지조 있다며 어찌나 띄워주는지. 이렇듯 대부분 사람들은 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데 사실 나는 내가 변해서 조금은 다행이다. 성격과 가치관에서 유독 그렇다. 가장 큰 변화는 남들에게 맞춰져 있던 삶의 중심이 조금은 내 쪽에 가까워진 것이다. 


남들이 하는 말, 그들에게 보일 내 모습, 나를 포장하고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했던 시기들이 있었다. 항상 번지르르하고 조화로운 상태에 안달을 냈었다. 연애하면서도 내가 애인을 너무 좋아해서 벅찼고, 그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는 게 싫었다. 당연히 그 애인이랑 오래 못 만났다. 내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남자 친구만큼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없다. 돈이나 시간을 떠나서 감정적으로 참 넉넉한 애라서 본인의 모든 감정과 애정을 나에게 쏟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도 그게 참 멋있고 대단하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랑 헤어지게 되면서도 나는 내 안정된 상태를 바꾸거나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리틀 윤선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집단과 단체에서 빠져나와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달라졌다. 드디어 변화하게 된 것이다. 내적 쇄국정책을 철수하고 남들이 아닌 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좀 더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직도 나는 남들이 내 얘기하는 것에 민감하고, 걱정하고, 더 좋은 사람으로 비쳤으며 좋겠다고 소망한다. 그래도 전처럼 좋은 사람을 떠나보낼 만큼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흔들리는 것에는 좀 단단해진 것 같다. 이 생각도 언젠가 흑역사로 남을지언정 또 나는 변하고 달라지고 싶다. 그게 연륜이고 경험이고 인생 자가 피드백이 아닌가. 이제는 윤선도 시조 속 바위나 소나무 말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매 순간 은근슬쩍 모양을 바꾸면서 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스물네 살의 방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