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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봤자 거기? 그래도 뛴다

벼룩

by 서람


'벼룩, 빈대, 이의 공통점은?'

그렇다.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해충들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모기보다도 악질이다. 모기는 초식성으로 산란을 위해 단백질이 필요한 암컷만 흡혈한다. 반면 이들은 암수 모두 동물의 피 자체가 생존의 필수 먹이이다.

이 중에서도 벼룩은 예로부터 유독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자기 키보다 100배 이상 점프할 수 있다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혐오하는 미물이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하찮은 행위가 인간의 삶에 적절한 풍자의 기준을 만들어냈다.


벼룩은 우리나라 언어 속에 실제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 ‘벼룩의 간을 내어 먹는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 ‘뛰어봤자 벼룩이다’ 등은 잘 알려진 속담이고 일상 대화 중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인간의 비열함, 어리석음, 체념이 그 말속에 녹아 있다. 위생 환경이 열악했던 과거, 누구나 한 번쯤은 벼룩에게 고통을 겪었기에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신장 대비 가장 높이 뛸 수 있는 곤충으로 기록된 벼룩을 심리학에서 조명한 용어가 있다. 바로 ‘벼룩 효과’이다. 벼룩은 강력한 뒷다리 2개를 밀쳐 올려서 높이 뛴다. 이 벼룩을 유리병에 가두고 투명 뚜껑을 닫으면 처음에는 뚜껑에 부딪힐 때까지 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부딪히지 않을 만큼만 뛴다. 현실의 벽에 신념이 꺾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흥미로운 건 뚜껑을 치웠을 때이다.

충분히 밖으로 나올 수 있음에도 뚜껑이 있었던 그 높이까지만 뛴다. 부정적 경험이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자기 능력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이것이 '벼룩 효과'이다. 발버둥을 쳐봐도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이다.


2013년 한국을 방문해 TV에 출연했던 호주의 연설가 닉 부이치치의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다. 팔다리 없이 태어난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앞으로 넘어져 머리를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시청자에게 전했던 그의 메시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그는 인간은 실패할 때마다 무언가 배우고 강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실패와 부족함 속에서도 계속 뛰는 사람만이 더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한계의 뚜껑을 만든 것과 또한 그 뚜껑을 걷어내는 것도 결국 자기 몫이다. 현실의 벽이 때로는 신념을 꺾지만, 다시 일으키는 힘도 결국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눈가에 절실함이 묻어났던 닉 부이치치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돈다.


"최고의 장애는 당신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벼룩은 벼룩목(目)에 속하는 곤충이다. 날개는 퇴화하였으며 흡혈에 적합한 주둥이를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분포해 여러 감염병을 매개하며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을 일으킨 페스트균을 쥐에게서 사람으로 전파했다.

벼룩이 있을지 모르는 오래된 물건을 파는 시장, 벼룩이 뛰듯 고정된 상점 대신 그날그날에 맞춰 물건을 들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장, 무엇보다 물건에 담긴 사연이 있는 중고거래시장을 가리켜 벼룩시장(Flea market)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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