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광덕산을 찾았다.
천안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
이번에는 2달 전 모임에서 결정된 광덕산이다.
광덕산은 천안과 아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이 산보다는 태화산이 더 이름 있고 산의 초입이고 하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광덕사의 산문에 태화산 광덕사라고 명기되어 있다.
광덕산에는 광덕사가 있고 그곳은 호두가 처음 중국에서 전래되어 재배된 곳이라 한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자손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천안이 호두과자의 명산이 된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 호두 역사의 공식적인 시작은 1290년(고려 충렬왕 16년)으로 기록되며, 당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유청신(柳淸臣) 선생이 임금을 모시고 귀국하면서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함께 가져온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묘목을 자신의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 광덕면의 광덕사 경내에 심었고, 가져온 열매는 집 뜰에 심었다고 전해지며, 그 묘목의 후손이 400여 년 수령을 자랑하며 광덕사에 자라고 있다"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광덕산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가는 방법도 연구를 했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가는 방법은 천안역에서 시내버스를 탑승하면 쉬운데, 다른 도시에서는 천안역 인근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탑승하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 자동차로 접근할 수밖에 없고, 천안도 자주 다니지 않는 시내버스를 회피하여 자가용으로 접근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덕산 주차장은 2개 있는데, 가까이 있는 주차장이 2 주차장이고 멀리 있는 곳이 1 주차장이다. 우리가 1 주차장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도착하니 이곳은 아닌 것 같아서 2 주차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만차다. 어디에 주차를 하여야 할지 고민을 하는데, 천안사람들은 일찍 움직이는 것 같다. 벌써 산행을 끝내고 하산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천안사람들 참 부지런하다.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이동을 한다. 산행은 광덕산을 오르는 1코스로 오르고 3코스로 하산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리가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다. 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의 산행이다. 일기예보상 약한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지만, 하늘은 비가 온다는 징후는 없다. 그래도 오후에는 더 많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오전에 산행을 끝내기로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후가 아닌 밤에 큰 비가 충청도와 전북지역에 내려 피해를 주었다.
호두와 관련된 비가 있고 오래된 고목이 그대로 있다. 저 나무가 전래된 호두나무의 자손들일 것이다. 광덕사는 스치고 지나간다. 광덕사에서 장군바위로 오르는 코스는 폐쇄되어 있다고 안내되어 있고, 1코스를 오른다. 3년 전 혼자서 오를 때도 그랬다고 보는데 참 계단이 많다고 느꼈는데 오늘도 계단이 많다.
이렇게 많은 계단이 있다 보니 힘들다고 하는 얘기다. 나는 그 계단이 그렇게 힘들지 않고 오르지만 남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지 않은 세대가 있는가 하면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든 세대가 있다. 지하철에도 상행선을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여야 하는지 하행선을 설치하여야 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상행선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내려가는 것이 힘들다..
능선에 도착하였다. 정자가 있고 바람이 불고 있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으나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저 즐거울 뿐이다. 광덕산은 가파르게 오른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분다. 광덕산을 바로 앞에 두고 한차례 숨을 고르고 오른다. 가족이 오르면서 가족을 걱정하는 것을 보았다. 광덕산 정상석은 3년 전에도 느꼈지만 아산과 천안이 따로 만들지 않고 같이 올렸다는 것이 인상이 깊다. 이곳은 기지국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이곳은 휴대폰이 잘 안 터지는 것이 예전이나 같다. 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동서남북을 보고 이제 장군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정상의 능선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되는 것이다. 장군바위까지 가는 그 길은 너무나 편안하고 좋다. 3-40분을 걸으면 장군바위다. 장군바위를 앞에서 보면 그렇지만 뒤에서 보면 레고로 만든 장난감 강아지 같다. 3년 전 이곳에서 망경산까지 왕복을 하였지만 오늘을 혼자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있기에 많은 산행보다 친목을 다진다. 그리고 이제는 하산이다. 하산하는 길에 안내되어 이정표는 부용묘이다.
부용묘는 조선시대의 이름난 여류시인의 묘라는 것이다. 그 묘를 지나고 하산할 것이다. 천안시 문인협회는 이 부용묘의 주인공을 기리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3년 전에 왔을 때 보다 정리가 되었고 관련된 기념물이 추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안 광덕산에 있는 부용묘는 조선시대 시인이자 기녀였던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의 묘소이다. 부용은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명기(名妓)로 불리며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졌다고 한다. 이 묘는 1974년 소설가 정비석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천안의 지역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그녀의 시 '석춘(惜春)'은 '가는 봄을 아쉬워한다'는 뜻으로, 계절의 변화 속에서 느껴지는 서글픈 감정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시는 부용의 애틋한 감수성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 담아보았다.
孤鶯啼歇雨絲료(고앵제헐우사료) 외로운 꾀꼬리 울다 그치고, 비 가늘게 내리네
窓掩黃昏暖碧紗(창엄황혼난벽사) 황혼에 창문 닫으니, 따뜻한 푸른 비단 휘장
無計留春春己老(무계유춘춘기로) 봄을 붙잡을 계책은 없는데, 봄은 이미 늙었구나
玉甁聯揷假梅花(옥병련삽가매화) 옥병에 가짜 매화 꺾어 나란히 꽂아 놓았네
소설가는 그냥 소설가가 아닌 것 같다. 역사 소설가들은 fact에 기반을 두고 그것에 살을 붙여 나가야 하기 때문에 사실을 찾아 나서고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그것을 기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소설을 그냥 소설로 보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 할 것 같다.
광덕산을 내려와서 이웃한 마곡사를 들렸다. 사실 이웃한 곳이라고 하여서 바로 옆이 아니고 거리는 20km 정도 되는 곳에 있다. 자동차로 이동을 하여서 그렇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