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경보가 내린 강원도

김일경 작

by 일경

등장인물

동인

머리

머털

구조대


배경

대한민국 강원도, 어느 집, 1월, 밤으로 넘어가는 때


1장

대설경보가 내린 강원도, 편의점도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갈 수 있는 이곳은 산이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그리고 어느 산 초입, 외딴섬 같이 덩그레 있는 단층집 안에서 동인이 잠을 자고 있다. 동인은 밤을 꼴딱 새우고 정오가 가까워질 때까지 타자를 두드리다가 방전된 모니터처럼 침대로 가 눈을 붙였다.

문제는 오후 일찍부터 흩날린 눈발이 옅어질 기미 없이 그대로 동인이 있는 지역을 덮어버린 것에서 이루어졌다. 이날, 강원도에는 관측 이후 최고 기록을 아득히 뛰어넘는 눈이 내렸다. 눈이 한창 쌓이고 있던 낮 때는 집의 작은 창문을 거의 다 가려 미세한 햇빛만 실처럼 들어왔었고,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갈 때는 이미 집은 물론, 산 봉우리만 겨우 보일 정도로 눈이 내렸다. 사태의 심각성은 국내외 언론사가 헬기를 통해 이곳의 평평하고 끝없는 설경을 송출하며 연신 재난상황임을 알리는 속보가 나올 정도였다.


잠결에 코 안이 이상하게 시린 것을 느낀 동인이 철근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떼고 몸을 일으킨다.


동인 : 밤이 되었나.


동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침대를 더듬거리다가 휴대폰을 찾고는 플래시를 켰다.


동인 : 뭐지, 더 어두운 것 같네. (침대에서 벗어나며) 읏, 추워.


플래시를 들고 발을 뗀 동인은 방을 가로질러 집 안의 형광등을 밝혔다. 그리고는 방 바닥 보일러의 온도를 더 높였다.


동인 : 한겨울 이래도 말이지, 올해는 유독 추운 것 같단 말이야. 집 안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니. 나도 참 둔하군. (배를 움켜쥐며)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플 정도네. 마지막으로 뭘 먹었더라? (냉장고를 열며) 신라면 먹었었네. 그럼 오늘은 진라면을 먹어야겠군.


동인은 라면을 끓이기 위한 준비를 한다. 냄비를 꺼내 싱크대의 물을 켠다. 어째서인지 물이 나오지 않는다.


동인 : 불은 들어오나? (가스밸브를 열고 레인지의 손잡이를 돌린다) 잘 들어오는데... 어제까진 나오던 물이 갑자기 왜? (위를 보며) 전기도, (불을 보며) 가스도 안 나갔는데... (발로 바닥을 문대며) 보일러도 들어오고 말이야. 물만 끊길 수가 있나? 물값을 안 냈을 리가 있나?


순간, 동인의 핸드폰에서 알람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동인 :(핸드폰을 보며) 열흘 남았구나.


동인은 라면 봉지를 손에 들고 창문 옆 벽에 걸린 달력 앞에 서서, 창문턱에 있는 유성매직으로 오늘 날짜에 X표시를 한다. 그리곤 잽싸게 노트북이 있는 책상 앞에 앉는다.


동인 : 오늘은 기필코 진도를 나가야지.


동인은 노트북을 펼치고 봉지라면을 투툭 부순다. 수프를 뿌리는 것도 부산스러웠는지, 우선 생라면 조각을 입 안에 가득 문다.
동인이 X 표시를 한 달력의 대각선 위로 머리가 있다. 머리는 벽과 하나인 모습으로, 박제된 짐승의 머리 같다. 머리는 보통의 남성보다 긴 머리카락과 도드라지지 않는 두개골격, 그리고 창백하지만 깨끗한 피부였다. 머리는 처음부터 이 공간 안에 있었다.


동인 : (생각하며) 음...


짧은 시간 타자를 치고 멈추고를 반복하던 동인은 이내 휴대폰을 집어 유튜브를 켠다. 그리곤 숏츠를 보기 시작하다가 어느 화면에서 멈춘다.


유튜브 숏츠 : (발랄한 음성으로) 너네들, 그거 알아? 지금 한국에 눈이 장난 아니래! 당연하게도! 강원도가 눈이 제일 많이 내렸는데! 마을 여러 개가 눈에 덮여서 사라졌다지 뭐야! 이게 바로 오늘 올라온 눈 덮인 강원도 영상인데, 엄청 예쁘지? 삿포로 안 가도 되겠다니까~?


동인 : 아무리 강원도라지만 이렇게까지 눈이 온 적이 있던가... (황급히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그만. 뭐 하는 거야, 지금 핸드폰 할 때냐. 왜 집중을 못하는 거야. 다시 해보자. (글을 읽다가 다시 타자를 두드린다) 어제 내가 뭘 쓴 거지... 분명 괜찮은 걸 썼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써야겠군. 주제의식부터 세워보자. 요즘은 노골적인 주제는 안 먹혀... 그런 건 숏츠랑 릴스가 하고 있으니까... 글은 더 담백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해. 최소한 글에서는 오리지널이 먹히는 법이거든... (손이 멈춘다) 근데, 진짜 그런가? 요즘 사람들이 오리지널을 좋아하긴 할까?


동인은 생라면을 손에 쥐더니, 오독오독 씹기 시작한다.


동인 : 오리지널은 진짜야. 진짜엔 진정성이 있지. 애초에 사람들이 진정성에 관심이 없잖아. 관심이 가는 건 미치게 만드는 것들 아니야? 좋은 거든 좆같은 거든 말이야. (수프를 찢고 생라면에 톡톡 뿌리며) 관심이 가는 것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도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자극 하나 안 느껴지는 진정성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야. 오? 이거 흥미로운데? (타자를 치다가, 다시 멈춘다) 아, 날아가버렸다. 내 영감. 젠장, 열흘 남았는데! (수프가 소복하게 올려진 생라면 조각을 입에 문다) 짜다. 그래도 혀를 감는 맛이 있구나. 있는 지도 몰랐던 침을 달콤하게 해 준단 말이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역시 너무 많이 뿌렸어.


동인은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500ml 생수병을 꺼내든다.


동인 : 한 병 남았군. 진작 사두면 좀 좋아? 아냐, 이 참에 정수기를 들여야겠어. 물 몇 병 사려고 매번 한 시간씩 걸리는 거리를 걸어 다녔어야 했으니까. (병뚜껑을 비틀고, 물을 벌컥 마신다) 입김이 날 정도로 추운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게 맞나 싶긴 하네. 짠기는 사라졌으니 그것도 시원하다고 보면 될까. 근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 보일러가 잘 돌아가는 게 맞는 건가?


순간 미동도 않던 머리가 동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깊은숨을 뱉는 머리의 입김 크기가 상당하다.


머리 : 보일러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어.


동인 : 그러네, 잘 돌아가는군.


머리 : 바닥을 만져보면 알잖아?


동인 : (자세를 숙이고 바닥을 매만지며) 분명 따뜻한데, (열선이 지나가는 바닥에 손을 올리며) 여기는 유독 뜨겁고.


머리 : 입김이 왜 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동인 : 알리가 있나?


머리 : 알면 이렇게 태평할 수 없지.


동인 : 내가 태평한가?


머리 : (잠시 생각하더니) 아닐 수도. 그런데, 생수가 있었으니 바로 라면 끓였으면 되지 않았어?


동인 : 그럼 입 속의 짠기는 어떻게 하지? 물은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야.


머리 : 생라면 부셔먹는 것보단 나은 것 같은데. 그래, 중요한 건 아니지. 어차피 매일 먹어왔잖아?


동인 : 아마 요 며칠은 그랬을걸.


머리 : 이제 시작하지 그래?


동인 : 무슨 말이야?


머리 : 열흘 남았다며.


동인 : 아, 그렇지! 그래. (자리에 황급히 앉고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뭐든 써야겠어. 자꾸 영감만 찾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머리 : 뭘 쓰고 있는 거야?


동인 : 쓰다 보면 뭐든 나올 거야. (잠시 멈춘다) 일단 세상 돌아가는 것좀 볼까?


동인 다시 숏츠를 켜며 멍하니 스크롤을 내린다. 그 시간이 꽤 적지 않다. 머리는 동인이 스크롤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동인을 쳐다본다. 그리곤 다시 강원도의 설경을 주제로 한 숏츠를 본다.


동인 : 정말 심각하구나. 설경은 예쁘네. 여기는 어떠려나, 생수 사러 또 그 먼 길을 걸어야 하는데 말이야.


머리 : 확인해 보지 그래? 또 생라면을 먹을 순 없으니 말이야.


동인 : 그럴까, 음. 근데 어차피 밤에는 나갈 수 없어. 여기는 빛이 없어서 차가 없으면 길을 잃기 쉽거든. 해가 뜨면 얼마나 눈이 쌓였나 봐야겠어.


머리 : (웃으며) 너 9일 남았어.


동인 : 무슨 소리, (핸드폰을 보며) 어? 분명 열흘 남았었는데?


머리 :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숏츠를 그렇게 오래 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알겠나. 동영상만 보지 말고 시계를 봐. 네 핸드폰은 고장 나지 않았다고.


동인 : 그러네, 오전 10시군. 이상하다... 분명히 열흘 남았었고, 라면 부셔먹고, 컴퓨터 앞에서 잠깐 봤을 뿐인데.


머리 : 큰 화면 앞에서 조그만 화면만 꾸부정 보는 모습이 꽤 우습지 않아?


동인 : 핸드폰이 손에 딱 알맞잖아. 화면의 크기가 전부는 아니라고.


머리 : 전부는 아니지. 맞는 말이다.


동인 : 근데, 오전 10시인데 왜이렇게 어두운거지?


머리 : 그런 적 없어? 나도 모르게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났는데 여전히 밤이었을 때 말야. 사실은 낮에 잠들고 밤에 일어난 건데, 나는 늘 그래왔듯 밤에 잠들었다고 생각하는거지. 아침에 일어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말야.


동인 : (동인, 혼란스러워한다) 이상해. (창문을 보며) 왜 아직 밤인 거지? 칠흑같이 어두워.


머리 : 오후인지 오전인지는 확인한거지?


동인 : 오전이야.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해.


머리 : 9일 남았어, 네가 할 일이 뭔지 기억은 하고 있나? 방금 했던 라면과 오리지널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는 건가?


동인,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동인 : (현관문의 고리를 잡고) 나가봐야겠어. (열리지 않자) 뭐야, 분명 잠겨 있진 않은데? (몸의 무게를 어깨로 실어 문을 밀며) 어째서 열리지 않는 거야?


동인은 얼마간 잔뜩 힘을 주다 문에 등을 기댄 뒤, 주저 않고 거친 숨을 몰아 쉰다. 머리, 동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머리 : 문이 얼음장 같을 텐데. 이봐, 글을 써야지. 얼마 없는 소중한 힘을 에먼 곳에 사용하는군.


동인: 밤이 아니었다고? 그럼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검색 좀 해봐야겠어.


동인, 벌떡 일어나더니 창문으로 향한다. 이후 핸드폰을 보다가 벽에 기댄다.


머리 : 검색하니까 나와?


동인 : 갓 태어난 강아지가 엄마를 잃어버렸다는데?


동인, 얼마 간 핸드폰 스크롤을 계속 내린다.


머리 : 알다가도 모르겠군. 여러모로 불안하지 않은가? 강아지가 널 걱정해야 할 건데.


동인 : 호들갑 떨지 마. 아직 밤이겠지. 나가면 뭐 달라지나?


머리 : 네가 오전이라고 했잖아.


동인, 창에 붙은 문고리를 당긴다. 끈적한 것을 떼내듯, 창을 여는 데 적잖은 힘이 들어간다.


머리 : 보통은 집 밖으로 창문이 향하지 않나? 미닫이 거나. 집 안으로 당겨서 여는 창문은 처음 보네.


동인, 빈틈없이 가득 찬 하얀 콘크리트 벽 같은 눈더미에 손을 댄다. 창문의 모양을 정확히 본뜬 듯 눈더미는 꽤 단단하고 균일한 모양새를 가졌다.


동인 : 이게 뭐지?


머리 : 눈으로 보고 있잖아?


동인 : 눈인가?


머리 : 눈이잖아.


동인 : (뒷걸음질 치며) 이게 다 눈이라고?


머리 : 하긴, 너도 처음 봤을 거다.


무대, 빠르게 어두워진다.


2장

동인은 활짝 열려있는 창문 앞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 창문을 가득채운 눈 벽은 대리석처럼 견고했다. 동인의 반복되는 발돋움 소리가 얼마간 이어지다가, 동인을 바라보던 머리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운을 뗀다.


머리 : 사자나 호랑이, 표범들이 서커스에 활용 됐을 때를 알아? 그래, 지금은 옛날이야기로 치부되는 그 시절 말이야. 그 맹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던 행동들이 있었어. 갇힌 시간이 길어지면 똥과 오줌을 여기저기 흩뿌리고, 그걸 네 발에 잔뜩 묻히면서 거대한 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은 우리를 뱅뱅뱅 돌았지. 예외는 없었어. 관리는 전혀 하지 않아서 철창이 배설물 때문에 녹이 슬면 그 고약한 쇠 냄새가 녀석들을 괴롭혔지. 후각이 예민한 녀석들이니 그 고통이 몇 배였을지 짐작이나 돼? 그러면 녀석들은 미친 듯 뱅뱅 도는 거야. 뭔가 문제인 것 같은데 어떤 게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것뿐이었던 거야. 뱅뱅뱅. 뱅뱅.


동인 : 그래, 여기 강원도였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왜 아무도 연락을 안 한 거지? 그래도 최소한 재난안내문자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얼마간 핸드폰을 만지다) 꺼놨었구나. 매일같이 울려대니 끄지 않을 수가 있나.


머리 : 진짜 재난상황엔 영 쓸모가 없군.


동인 : 뭐든 그렇지, 필요할 땐 없으니 말이야. 근데 넌 뭔데 자꾸 옆에서 거드는 거야? 알고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 하는 거 아냐.


머리 : 진작 말했으면 뭐가 달라지나? 그리고 너한테 누가 연락을 하긴 해?


동인 : 연락이 왜 안 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알았으면 연락 왔을 거야.


머리 : 왔어?


동인,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다.


머리 : 네가 전화를 하는 건 어때? 통신은 아직 되는 것 같은데.


동인 : 그래, 네 말이 맞아. (전화번호를 누른다) 아 네, 안녕하세요. 맞아요, 위치 추적이 되는군요. 아무래도 눈 속에 갇힌 것 같아요. 여기... (머리를 힐끔 보다가) 한 명 있어요. 언제 오실 수 있어요? (실망한 듯) 얼마나 쌓인 거예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럼 언제... (잠시 전화 속 소리를 듣다가 냉장고에 향한다) 지금... 라면이 좀 있어요. 아 최대한요... 네, 알겠습니다. 기다릴게요.


동인, 전화 끊는다.


머리 : 누구야?


동인 : 119에 전화해 봤어. 다행히 위치는 잡힌다는군. 문제는 눈이 쌓인 것도 문제지만 파내는 장비가 여기까지 접근하는 게 어려워서 조금 기다려달래.


머리 :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동인 : 일주일...


머리 : 일주일?


머리, 호탕하고 건조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꽤 기괴하다.


머리 : 저 정도 라면이면 충분히 버티겠는데?


동인 : 물은 벽 긁어서 녹여 먹으면 되고.


머리 : 전기랑 가스가 안 나가길 기도해야겠는데?


동인 : 크게 문제는 없어. 생라면 먹으면 되니까.


머리 : 너는 추위를 모르나 보군.


동인 : 겨울은 원래 추운 거야.


머리 : 그래, 겨울은 원래 춥지. 이제 할 일을 해야지. 구조받을 때쯤 완성할 수 있겠는데?


동인 : 아! 그래, 작품... 며칠 남았지?


머리 : 9일 남았어. 아까 말했잖아.


동인 : 그래, 잘 됐다. 할 일이 있었어.


머리 :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거 아니야?


동인 :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야. 이 작품을 완성하려고 서울에서 사람 없는 여기까지 왔다고. 굳이 사람도 없는 첩첩산중을 선택한 이유도 작품에 모든 집중을 쏟기 위해서였어. 이 작품은 내게 그런 의미가 있어. 과업과 같아.


머리 : 그렇게 찔끔 쓰고 핸드폰만 볼 거면 서울에서 했어도 되는 거 아닌가?


동인 : 이건 다른 이야기잖아.


머리 : 다른 이야기라고?


동인 :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만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제 정말 집중해야겠어. (노트북 앞에 앉는다) 자, 그래. 주제 의식부터 다시 세워보자.


머리 : 8일 남았다.


동인, 순간 손을 멈춘다.


동인 : 지금 몇 시지? 8일 이라니? 분명 9일 남았다고 하지 않았어?


머리 : 핸드폰을 봐. 아니면 네가 앉아있기만 하는 그 노트북 모니터를 보던지.


동인 : 정말이네.


머리 : 모니터를 보고 있긴 한 거야? 키보드를 누르긴 했고? 숏츠로 뭐 봤는 진 기억나?


동인 : (벌떡 일어서며) 아무래도... 잠을 자야 하지 않을까?


머리 : 대단하군.


동인 : 네 말대로라면 나는 하룻밤을 꼴딱 샌 거잖아. 잠을 푹 잔다음에 맑은 정신으로 글을 써야 작품도 나오는 법이야.


머리 : 넌 계속 피하는 거야. 뭘 쓰는지 중요하지도 않아. 키보드에 손만 올려버리면 만족해 버려서 종소리를 들은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핸드폰을 보지.


동인 : 그러니 시간이 계속 떠있어도 볼리가 있나. 숏츠도 너무 길어서 도중에 넘기는 데 말이야. 모든 것들이 찰나고, 깜빡하면 다른 것이 시작되는데 시간은 의미가 없지.


머리 : 넌 뭘 쓰고 싶은 거야?


동인 : 자야겠어.


머리 : 노트북 좀 내 앞에 놔봐. 뭘 썼는지 구경이라도 해보자.


동인, 침대로 향한다.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들자 전화가 울린다.


동인 : 네, 여보세요. 그 주소 맞을 거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위치가 잡힌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끝까지 파본게 맞아요? (대답을 듣다가) 위치를 알고 있으면 날 찾았어야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에요? 미쳤군. (전화를 끊는다)


머리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동인 : 그러게, 구출하러 왔다면 희미하게라도 사람 소리가 들렸어야 했을 텐데.


머리 : 여기가 엄청 깊은 걸까, 아니면 구조대가 잘못된 구멍을 파버린 걸까?


동인 : 알 수 없어.


머리 : 더 파야 할까? 새로 파야 할까? 그나저나, 위치를 모를 수가 있나? 이 나라 통신은 세계 1위 아니었어?


동인 : 도저히 가늠이 안되는군. 잠깐, 근데 일주일은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머리 : 그랬지.


동인 : 어째서 전화가 온 거지? 설마...


머리 : 시간은 그대로야. 8일 남았어. 잔다며?


동인 : 아, 그랬지.


머리 : 푹 자고 맑은 정신으로, 이번에는 꼭 완성해 보자고. 라면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 말고 네가 뭘 쓰고자 했는지 나도 궁금하니 말이야.


동인 : 일주일은 걸린댔는데... (하품한다) 어째서.


머리 : 팔이 없어 형광등 하나 끄지 못하는 군. 여긴 쓸데없이 밝지 않아?


동인 : 자야겠어...


머리 : 그렇게 깊은 곳에 있다면 전화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걸까?


동인 : 졸음이...


머리 : 데이터는 어떻게 잡히는 걸까? 뭘로 땅을 파길래 바닥 하나 보지 못했다는 거지? 구조대는 바닥이 뭔진 알겠지? 눈이랑 땅은 구분할 테니까. 걔네 구조대 맞아?


동인, 잠에 든다. 머리는 동인이 잠에 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혼잣말을 뚝 멈춘다. 동인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무대, 어두워진다.


3장

창문 너머 눈더미 저 멀리에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동인이 잠에서 일어나 여전히 쌓여 있는 눈더미를 본다. 머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동인은 머리 앞에 서서 미술품을 보는 듯 빤히 쳐다본다. 그럼에도 머리는 작은 숨 하나 뱉지 않으며 굳어 있다. 눈더미의 사각사각 소리는 점점 동인의 집 창문에 가까워진다. 그러다 소리는 첫눈을 밟은 듯 뽀득 거리는 소리로 빠르게 변하더니 대리석같이 견고한 눈더미에 금이 간다. 머리와 수염을 잔뜩 기른 남자인 '머털'이 금이 간 틈새에서 툭 튀어나온다. 얼굴을 들이밀고 그가 숨을 마신다.


머털 : 오호호~ 집! 오랜만에 진짜 집다운 집이다! 킁킁- 아! 냄새가 난다. 전기 냄새야. 그리고... 라면 국물! 아니 분말가루인가? 물 냄새보단 가루 냄새네. 라면인 건 분명하다. 신라면인가? 진라면? 어 그래, 역시 국물이 아니구나. 너 생라면 부셔 먹었지?


머털, 눈 벽에서 팔을 뽑아내 힘껏 아등바등하더니, 내동댕이 쳐지듯 집 안으로 들어온다.


머털 : (몸에 있는 눈을 털고 일어나며) 아! 땅을 얼마 만에 밟는 거지? 근데 진짜, 눈이 그렇게까지 단단할 줄은 나도 몰랐어. 내가 기어서, 비비고, 으어억~ 하고 나오는 동안 너는 뭐 했냐, 어? 아무것도 안 했지? 창문에 귀라도 대봤냐? 기껏 살아 있으면서 말이야, 기척도 안 하고. 그래도 여긴 공기가 좀 살아있네. 파지직 전기 냄새, 라면 분말 냄새. 킁킁킁- 이건... 남자 냄새구나! 역시 사람 냄새가 제일 아리송해. 막 섞여서 이것저것. 뭔지 알지? 으하하! 있잖아, 눈 속은 정말 죽은 공기였어. (동인 말이 없다) 응? 아, 그게 말이지, 눈이라는 게 촉촉한 물 냄새나 뭐 땅 냄새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겉은 폭신한 척하고 속은 돌덩이야. 나 진짜 뭉개질 뻔했다니까. 근데 여기 말야. 공기만 따뜻한 거였네, 바닥은 왜 이리 차가운 거야? (동인 여전히 머리를 쳐다본다) 아니, 나 진짜 말 안 하려고 했거든? 들어오면 딱 “안녕하세요”만 하고, 네 공간이니까 저 멀리 앉아서 조용히 있으려 했단 말이야. 근데! 와, 여기 오니까 너무 조용한 거야.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어. 내 입이 막 울어. 입이 막 “나 좀 써줘! 혀를 놀리고 이빨끼리 부딪쳐 황홀하게 해 줘” 하는 거야. 그거 알지? (동인, 말이 없다) 몰라? 여기 너 혼자야? 이상하게 적막해. 말들이 다 벽에 붙어서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어떤 집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잖아. 예를 들면 우리 집! 우리 집은 말이 넘쳐나. 엄마, 아빠, 형, 누나, 옆집 아저씨, TV 속 사람, 개 짖는 소리까지. 다 말해. 근데 여긴... 네가 말해야 말이 나올 것 같은 집이야. 킁킁킁. (냄새를 더 자세히 맡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이듯) 너 혼자 있는 거 진짜 오래됐구나. 사람이랑 안 섞이면 냄새가 바뀌어. 아니- 뭐 냄새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있잖아,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냥... 말이 없는 사람 냄새가 있어. 무취인데 묘하게 무거운 거. 냄새에 무게가 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그런 게 있어! 유일하게 무게를 느끼는 감각이 바로 후각이거든. 촉감이 느끼는 무게는 다 거짓말이야.


머털, 동인의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들어 생라면 부스러기, 수프를 허공에 탈탈 턴다.


머털 : 우리 엄마는 이런 거 절대 안 봐줘. 밥은 꼭 식탁에서 먹었어야 했거든. 책상은 책 읽는 곳, 식탁은 밥 먹는 곳. 똑같이 생겼어도 엄연히 다른 건데, 그걸 왜 모를까? 너 말이야. (동인의 글을 본다) 뭐야? 일기를 쓰는구나?


동인 : (움직이며) 당신 뭐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머털 : 뭘 어떻게 와. 봤잖아, 눈 파서 찾아온 거야. 일기가 정말 재미없구나. 오늘 일어나서 핸드폰을 봤다. 입맛이 없어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먹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짠맛은 달구나? 뭐라는 거야? 아, 여기까지 쓰고 영감이 사라졌다. 글을 충전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어부가 된다. 낚싯대를 던지고 기다린다. 하염없이 기다린다. (동인에게) 낚시 바늘은 네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가 물 속이잖아! 오호호!


동인 : 이리 내! 누가 읽으라고 했어!


머털 : 읽는다고 다 글이냐? 아무튼 말이야, 내가 버릇없긴 했어. 손님인데 다소 경솔했달까? 근데 너도 손님 대접이 이게 뭐냐. 보아하니 사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이러니까 사람들이 너랑 안 마주치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 건 어떻게 아냐고? 말했잖아, 냄새엔 무게가 있어. 너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냄새가 나. 냄새는 거짓말 안 해. 너한테는 밀가루 냄새, 전기 냄새, 분말 냄새 밖에 없어. 그리고, 양치 좀 해. 말 안 하면 이가 안 썩는다니? 그래,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눈을 어떻게 팠는지 궁금하지? 그전에 눈이 뭉치면 얼마나 단단해지는지부터 이야기를 해야겠어. 바위를 부수는 눈덩이를 본 적이 있어? 그런 눈은 얼음도 부신다니까? 야, 신기하지 않아? 같은 물로 만들어진 건데 하나가 된 물을 수억 개의 물이 부신다니 말이야. 눈도 합쳐지면 하나가 아니냐고? 바보야, 그럼 얼음이 되는 거라니까?


동인 : 몸이 영 개운하지 않아. 헛것을 보는 건가? (머리를 바라보며) 이봐, 며칠 남았어?


머리, 여전히 굳어있다.


동인 : 그니까 며칠 남은 걸로 생각해야 하더라? 어제 내가 X표 하고 잠에 들었던가? 어제가 며칠이었더라?


머털 : 얼음이고 눈이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거지? 근데 중요한 이야기였어. 생각해 봐, 내가 도구 하나 없이 이 눈더미를 어떻게 파헤쳤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였다고. 얼음도 부숴버리는 이 눈을 말이야!


동인, 머털을 쳐다본다.


머털 : 오호호! 드디어 관심을 가지는구먼? 자! 그럼 퀴즈. 나는 어느 부위로 눈을 팠게! 1번, 손바닥. 2번, 손가락. 3번, 손톱. 4번, 손등! (머털, 가만히 있는 동인을 쳐다본다) 정답은... 바로...!


동인 : 잠깐, 5일? (다섯 개의 X표를 보며) 5일이라고?


머털 : 오일을 발랐다곤 한 적 없는데...


동인 : 미쳤군. 진짜 미쳤어. 장난일 거야 분명. (머털을 밀어내고 다급히 책상에 앉는다) 진짜 5일이 지났네...? 내가 10시간 이상 잠을 잔다고? 아니, 며칠을 잠잘 수 있다고?


머털 : 정답은... 어깨야! 손으로 파면 손가락으로 나뉘어 있으니까, 손가락은 손톱으로도 나눌 수 있으니까, 손톱 안엔 예민한 혈관도 많으니까 눈보다 먼저 부서지거든. 방금 얼음과 뭉친 눈 이야기 기억나지? 기억이 안 나면 이상한 거지? 어깨도 결국 째보면 뼈와 살로 나뉘고, 피부가 감싸고, 혈관이 있지만 손보다 더 촘촘하게 뭉쳐져 있잖아? 그리고 말이지, 결국 눈이 아무리 얼음을 부셔도 온기 앞에선 녹기 마련이거든. 물론 내 어깨도 같이 차가워지지만, 일단 눈을 파야 내가 살 거 아냐? 오호호! 그래, 어깨로 눈을 어떻게 파는지, 그게 궁금하다는 거지?


동인 : (번뜩이며) 그래, 이 이야기를 써야겠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 잠을 자면 수 일이 지나있고, 눈 깜빡할 새 눈에 갇힌 이야기를.


동인, 타자를 치기 시작한다.


머털 : 오호호! 그래 뭐든 해봐. 해야 느는 거야. 안 해보고 머리에만 남겨놓는 건 누구나 다 해. 말은 다 해. 실제로 하라고 하면 못해. 그게 사람이야. 너무 똑똑해져 버린 거지. 근데 반만 똑똑한 거야. 어디에서 이것저것 보고 와가지고 이런 게 좋다더라, 저런 게 좋다더라, 남들한테 말로는 그렇게 떠드는데, 스스로 해보려고 하면 이미 바보 같은 것들에 절여진 몸이 절대 안 받아주는 거야. 뇌는 이미 생각을 멈춘 지 오래됐고, 뼈와 근육은 어린 시절의 유연함은 꿈도 못 꾸고, 늘 속은 메스꺼워.


동인 : (타자를 치며) 구조대가 연락이 온 건 분명... 8일이 남았을 때였다. 너무 졸려 잠을 자고 일어나니, 5일이 남았다. 벽에는 X표가 다섯 개가 있었고... 근데, 자는 동안 누가 X표를 한 거지?


머털 : 궁금한 건 좋아. 이봐! 내 말을 좀 들어주겠어? 누가 표시를 했냐 보다, 여기를 어깨로 어떻게 뚫어냈는지가 더 궁금하지 않아? 상식적으로 그게 더 궁금하잖아. 어깨가 얼굴보다 더 앞에 있는데, 어떻게 어깨로 눈덩이 굴을 팔 수 있는지 전혀 안 궁금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어깨를 움직여보려고 해도 결국 앞으로 가려면 눈덩이를 얼굴로 맞이해야 하니 말이야. 흥미롭지 않아?


동인 : 분명 나는 자고 있었어. 내가 잠깐 새벽에 일어나서 표시를 했던가? 그게 말이 되나? 굳이 비몽사몽 할 때 X표시를 3번이나 더 해둔다는 게? 그리고, 이미 모든 시계가 3일이 지났다고 말하고 있잖아. 내가 정신이 나갔을 수 있어도 시계는 거짓말 안 할 거 아니야. (머리를 보며) 그럼 저 녀석이 그랬다는 거야? 그럴 리가. 손이 갑자기 생겼을 리가 없어. 없어? 정말 없나? 그런데, 쟤는 왜 저러고 있지? 몸이 있을 거 아닌가? 왜 의심을 안 하고 있었지? 아니... 무슨 의심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우리 집 벽에, 머리를? 왜?


머리,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머털, 목소리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머털 : 이봐! 오호호! 무시도 적당히 해야지! 네가 혼자 있지 않을 때가 흔한 줄 알아? 내가 있잖아, 내가 말 걸잖아. 그냥 "궁금해요. 분명 머리가 더 앞에 있는데 어깨로 어떻게 굴을 파신 거예요? 어떻게요?" 이거 한 마디면 내가 정말 재밌게 알려줄 수 있다니까?


동인 : (타자를 친다) 이상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눈이 아무리 오더라도, 집이 잠길 정도로 온 적은 없었다. 전기도, 가스도 잘 나오는데 물만 끊겼다... 이상하지 않은가? 얼었다 하더라도 여기를 감싸는 게 다 물인데, 집 안엔 온기가 분명히 있는데, 그럼 물이 나와야 하는데 왜 물만 나오지 않는가?


머털 : 야, 한마디면 된다니까? 젠장, 보여주고 싶어 죽겠다니까? 아니... 말하고 싶어! 알려주고 싶어! 네가 궁금했으면 좋겠어. 어떻게 내가 손을 안 쓰고 어깨로만 여기까지 굴을 팠는지 알려주고 싶어. 아아, 머리에 피가 잔뜩 몰린 것 같아. 피비린내가 나. 킁킁킁, 아아아.


동인 : 이 상황 모든 걸 왜 의심하지 않은 거지? 왜 눈에 보이는 X 표시만 의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거지? 구조대, 구조대는 전혀 연락이 오지 않잖아. 구조대... 구조대가... (핸드폰을 본다) 여전히... (다시 쇼츠를 보며) 엇, 강아지 귀엽다.


머털 : (버럭 한다) 야이 개새끼야! 왜 자꾸 날 무시하는 거야? 무시 따위 절대 못하게 해 줄까? 그냥 궁금해할 필요도 없어. 내가 보여줄게. 볼 수밖에 없게, 어깨로 어떻게 눈 굴을 팠는지 보여줄게. 당장 보여줄게.


머털, 창문 옆 벽으로 가 연신 힘껏 머리를 박는다. 수차례 박는다. 집 내부가 쾅쾅 울려 퍼지는 소리에 압도된다.


머털 : (머리를 박으며) 당연하잖아? 반전이 있었던 것 같아? 당연히 어깨보다 머리가 먼저 닿으니까, 머리를 쓸 수밖에 없지. 정답은 말이야, 머리로 깨서 어깨로 파는 거야. 파는 거랑 깨는 거랑은 확실히 달라. 어림짐작 하지 마. 오호호! 그렇지만 아직 남아있으니까! 어깨로 어떻게 파는지를 보여줘야겠지! 이제 거의, 다-.


머털이 연신 박은 벽은 역시 금이 가더니, 머털이 힘껏 내리 친 마지막 한 번의 박치기에 구멍이 생겼다. 그 크기가 머털의 머리보다 조금 더 크다. 머털의 머리는 벽 안으로 들어가 눈 속에 파묻혔다. 머털의 몸은 머리가 벽에 박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인 : (타자를 계속 친다) 이건 분명히 먹힐 거야. 대중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어. 대중은 진짜보다 자극적인 걸 좋아하잖아. 근데 난 더 엄청난 걸 알아낸거야. 날 봐. 알아챘잖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알아챘잖아? 이거는 진짜이면서 자극적인 거야. 아무도, 유튜브도, 인스타도, 틱톡도 다루지 않은 무언가야. 이 글만 세상에 나가면 분명히, 나는 이제 드디어!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집 안의 모든 전기가 나갔다. 형광등은 물론, 동인이 열심히 작성하던 노트북의 전원도 나갔다. 집 안이 심연과 같이 어두워졌다. 동인, 비명을 지른다.


동인 : 아아아! 어떻게 쓴 건데! 이걸 어떻게 쓴 건데! 이게 왜 갑자기?


머리, 눈을 뜨고 태연히 입을 연다.


머리 : 구조대는 안 기다리기로 한 거야?


동인 : 이런 건 다시 쓰라고 해도 절대 못쓰는 건데!


머리 : 빛이라도 있었으면 네 몰골을 보기 좋았을 텐데 말이야.


동인, 핸드폰의 플래시를 켠다. 머리를 비춘다.


머리 : 수다쟁이가 있었더군. 아, 나를 비추니까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네.


동인 : 내 걸작이 사라졌어. 하늘이 날 놀리는 것 같군. 노트북이 왜 같이 꺼지는건데?


머리 : 네가 좋아하는 핸드폰만 남기고 말야. 그렇지? 아, 부서진다.


동인 : 이미 부서졌어.


머리 : 눈 속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자고. 많이 추울거야.


머털이 부순 구멍을 시작으로 금이 점차 커졌고, 천장에선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은 가루가 날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빠르게 무너졌고, 지붕을 누르고 있던 눈더미가 와르르 쏟아져 빈틈 하나 없이 집 안을 채웠다. 무대, 빠르게 어두워진다.


4장

무대, 아주 좁은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눈 속에 파묻힌 동인과 머리, 머털의 머리가 삼각형의 각 꼭지를 차지하듯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모습들이 벽에 걸린 머리의 모습과 같다. 집이 눈에 파묻히면서 생긴 여파는 그 근처의 다른 여러 빈 공간을 채웠고, 그러면서 이들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왜 셋의 머리가 한 곳에 모였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공간은 토끼굴 같이 좁지만 아늑했다. 머리 세 개와 동인의 핸드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동인 : 아파. 젠장,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팔다리에 감각이 없어.


머털은 이마의 피가 얼어 겨우 멈춘 모습이었다. 피가 얼마나 나왔는지, 얼굴을 덮어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머털 : 아파! 킁킁킁! 피! 피냄새잖아? 나한테 나는 냄새인가? 킁킁킁 죽은 냄새. 죽은 냄새가 잔뜩 나는군. 얼어붙어 말라버린 죽은 냄새 말이야. 아닌가? 피냄새는 살아있는 냄새잖아? 죽은 냄새와 살아있는 냄새가 동시에 난다니! 아, 원래 그랬었지. 우리 이모가 말이야, 정육점을 하셨거든? 거기에는 육고기 냄새, 무쇠 칼 냄새 이것저것 났는데 말이야. 제일 흥미로운 냄새가 뭔지 알아? 바로 계란. 알 냄새야. 얇은 껍질 안팎으로 나는 죽음과 생명의 냄새. 계란 냄새를 맡으면 늘 이런 아리송한 게 있었는데! 그런 냄새야! 우리 지금 되게 아리송하지 않아?


동인 : 젠장, 너 정말 말이 많구나.


머털 : 뭐야, 너 드디어 내 말에 대답하는 거야? 야! 듣고 있었던 거야? 오호호! 이거 정말 발칙한 녀석이네? 여태 개무시를 했다는 거잖아?


동인 : 이제야 들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는 말을 계속 해대니까 대답할 수가 없지.


머리 : 진짜 재난 상황이 오니 쓸모가 있어졌나? 하하하. (건조하게 웃는다)


동인 : 추워.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군.


머리 : 이지경까지 왔으니 이야기해 봐. 뭘 쓰고 있었던 거야?


머털 : 내가 봤는데, 별 이야기 아니었어. 습작 수준이었어. 내용도 없고, 뭘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동인 : 방금 글은 정말 역작이었어. 세상에 나왔다면 분명히 역사를 만들었을 거야.


머리 : 네 글에 관심 가지는 게 나 말고 또 있나?


머털 : 나는 아니야. (동인에게) 내 말만 들었어도, 어깨로 굴을 어떻게 파는지만 물어봤어도 이 꼴은 안 됐을 거다.


동인 : 그럼 잘난 어깨로 여기도 빠져나가지 그래?


머털 : 바보야,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가. 눈이 안 보이니 밖이 어딘지 못 보는 게 문제 이긴 한데, 파다 보면 나오겠지. 여태 그랬듯 말이야. 날 원망하진 마. 너무 시간 끌었다. 지루해지기 전에 난 가야겠어. 만날 수 있다면 또 보자고. 생각보다 여긴 좁으니까 말이야.


머털의 머리 주변이 들썩 거리다가, 천천히 눈 속으로 들어간다. 머털이 들어간 눈 속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여러 번 나더니 이내 머털이 있던 구멍에서 눈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 소리가 이곳에 가득하다가 점차 멀어졌다.


머리 : 갔네.


동인 : 진짜 어깨로 굴을 팠던 건가. 방법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머리 : 왜? 이제야 좀 관심이 생겨? 하긴, 네 태평함이 지금까지 연명할 수 있게 만들어준 거다.


동인 : 넌 뭐야? 옆에서 간섭이나 하고 말이야. 너도 빌어먹은 어깨로 빠져나가지 그래?


머리 : 그럴 거였으면 진작 나갔다. 해야 하는데도 안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잘 알잖아?


저 멀리, 동인의 핸드폰에 불이 들어와 벨소리가 울린다.


동인 : 핸드폰! 뭐야, 핸드폰이 여기 왜 있지? 분명 구조대일 텐데! (버둥거린다) 몸이 움직이질 않아.


팔 하나가 눈을 뚫고 나와 핸드폰을 들고, 능숙하게 전화를 받아 스피커 폰으로 전환한다. 수화기 속 상황은 여러 중장비가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하다.


구조대 : 여보세요! 김동인 씨! 지금 김동인 씨 위치 파악하여 구조 작업 중에 있습니다! 신원 파악 차 전화 드렸습니다! 여전히 집에 계시는 거죠?


동인 : 급해요! 지금 집이 전복되어 눈더미에 파묻혔어요. 얼마 못 버틸 것 같아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구조대 : 거의 다 왔습니다! 10분, 아니 한 20분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심호흡하시고, 최대한 살기 위해 노력하세요. 기억하세요! 저희가 분명히 구출하러 갑니다. 다 왔어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구출해 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멀리하며) 위급 상황, 더 빠르게 파도록 해! (다시 수화기 가까이) 정신을 잘 잡고 있는 게 중요하니까 저랑 계속 통화하시죠. 거의 다 왔습니다! 아시겠죠?


동인 : 네! 저는 괜찮아요! 조금 추울 뿐이에요. 다 온 거 맞죠?


구조대 : 네! 물론...


팔,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저 멀리 던진다.


동인 : 뭐야! 뭐냐고!


머리 : 이상하지 않아? 여전히 조용해. 10분이면 저 멀리 소리라도 났어야 하잖아? 아까 그 말 많은 녀석 굴 파는 소리도 꽤 오랫동안 났는데, 이상하게 조용해.


동인 : 그렇다고 전화를 끊으면 어떻게 해? 너 도대체 뭐야!


머리 : 내가 한 거 아닌데? 내가 무슨 팔척귀신도 아니고 저 멀리에 팔을 어떻게 뻗어.


동인 : 뭐?


머리 : 그리고 말했잖아. 왜 조용하냐는 거야. 수화기 안은 시끌벅적하던데, 긴 시간이 더 걸린다 해도 조그만 소리라도 났어야지.


동인 : 그럼 구조대가 또 장소를 잘못 알고 굴을 파고 있다는 거야?


머리 : 2025년에 말이지.


동인 :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여기서 얼마나 버티라는 거야.


머리 : 너 4일 남았어.


동인 : 나도 쓰고 싶어. 그걸 완성해야 한다고! 근데 컴퓨터는커녕 손도 뻗을 수 없잖아.


머리 : 입은 말할 수 있잖아? 그래서 넌 뭘 쓰려는 거였는데?


동인 : 그게, 그러니까...


잠시, 이곳에 정적이 흐른다.


머리 : 영감이 날아가버렸나?


동인, 말이 없다.


머리 : 그러길래 서울에서 했으면... 아니다.


동인, 조용히 눈을 감는다.


머리 : 숨만 쉬고 작품은 못 만들었을 거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긴 하지. 안 만들면 어때,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원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산다.


동인, 말이 없다.


머리 : 노력이라도 했으니 됐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구조대가 오려나?


머리, 눈을 감는다. 동인과 머리 모두 눈을 감고 굳은 모습이다. 무대 천천히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는 무대 사이로 핸드폰 액정에서 빛과 함께 전화벨소리가 울린다. 벨소리는 무대가 천천히 어두워지는 사이 여러 번 울리다가 이내 뚝 끊긴다. 무대, 완전히 어두워진다.


end









작가의 이전글<그와의 조우> 기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