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Episode 1. 사장의 시선

기회 3

by 디케이

기회 3


JS전자로부터 답을 기다린 지 어느덧 열흘째 되는 날이다. 처음 예정된 날짜가 하루이틀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조금 늦어지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닷새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직원들에게 티 내지 않고 불안을 감추는 것도 한계였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이면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그려 봤다. ‘이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지금 자금으로는 한 달 정도도 더 버틸 수 없었다. 겨우 한 달을 그렇게 버티더라도 새로운 고객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무리하게 투입된 개발 비용은 이미 임계점을 넘었고, 지금 당장 유의미한 계약을 따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메일함을 확인한 것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메일을 확인했다.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JS전자 프로젝트 관련 진행의 건]


숨이 멎는 듯했다. 긴장된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집중을 해서 신중하게 메일을 열었다. 그 짧은 시간이 마치 긴 영화처럼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코어테크 담당자님. 내부 논의가 길어져서 답변이 늦어진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희 JS전자는 내부 회의 결과 귀사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계약과 관련한 협상 등의 절차를 진행하고자 하오니,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뵙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눈을 여러 번 의심했다. 다시 읽어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계약과 관련한 협상’이라는 문구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털썩 기대어 앉았다. 마치 4년 동안이나 가슴을 짓눌러 온 큰 돌덩이가 한순간에 녹아 사라진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졌다.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동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제품 개발을 시작한 지 벌써 4년. 처음 개발팀장 서민우를 어렵게 설득하던 순간부터, 직원들에게 계속되는 야근을 부탁하며 미안함에 마음 졸이던 순간들, 그리고 예상보다 커지는 비용에 날마다 숫자 앞에서 절망하던 밤과 돈을 더 빌리러 다녀야 하는 처절함. 그리고 이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더는 버틸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한 기다림까지. 잠시 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영업팀장 이준혁이 급하게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 팀장! 됐어요! JS전자에서 우리를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어요!”


이준혁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 정말입니까? 확실한 거죠?”

“정말이에요. 방금 메일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그는 큰 소리로 환호했다.


“와! 드디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사장님, 진짜 걱정했거든요. 솔직히 며칠 동안 밥도 잘 못 먹었어요.”


그 말에 나 역시 웃음이 터졌다. 기술팀장 서민우가 영문을 모른 채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고객사에서 연락 왔어요?”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우선협상대상자라는 연락 왔습니다!”

평소 냉정하던 서민우의 눈도 흔들렸다. 그는 몇 초간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시간이 늘어지면서 솔직히 좀 비관적으로 생각했는데... 하아, 이거 참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회사 내부가 이내 떠들썩해졌다. 직원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로를 격려하고 박수를 쳤다. 잠시 후 경영지원팀장도 소식을 듣고 왔다.

“사장님, 진짜예요? 진짜 계약된 거죠?”
“맞아요. 우리가 해냈어요. 이제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들 밝은 얼굴로 한동안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나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수많은 고통스러운 밤이 이 순간 하나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결과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가 이렇게 웃는 일도 없었겠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곧 본계약 체결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직원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한참 동안 사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잠시 후, 나는 팀장들을 조용히 불러 모았다.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오늘의 기쁨은 충분히 즐겨도 좋지만, 이번 계약건은 이제 막 시작입니다. 본계약을 마무리하는 것에 문제가 없겠지만 아직 최종적으로 계약서에 도장 찍을 때까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이 팀장님은 고객 커뮤니케이션과 관계 관리를 맡아 주시고, 서 팀장님은 기술 구현과 품질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팀장님은 협상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최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 주시고요.”


서민우 팀장이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끝까지 책임지고 요구 기능들 작 파악하고 준비하여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장님.”


이준혁 팀장도 떨리는 목소리로 각오를 밝혔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계약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팀장들의 든든한 목소리를 듣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이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와 혼자 파묻히듯 의자에 앉았다. 문득 눈앞에 모니터에 아직 열려 있는 JS전자의 메일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면 속의 글자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이제부터 이번 계약을 계기로 반전을 이뤄 내야 해.'


나는 이 계약이 단순히 첫 번째 계약으로 끝나지 않기를, 이 계약을 통해 우리가 꿈꾸던 제조업 디지털 전환이 현실이 되고 우리의 미래가 더 밝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동안의 모든 초조함과 불안이 비로소 조금씩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되어야 했다. 오늘의 이 첫 고객이 우리의 마지막 고객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고객의 시작점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그토록 기다렸던 오늘, 드디어 우리 회사에 우리가 개발한 제품을 선택한 진짜 고객이 생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동안의 힘들었던 모든 날들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여러 우려 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JS전자와 무사히 계약까지 마무리를 하였다. 하지만 계약 성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후 고객과의 첫 번째 본격적인 구축 미팅이 진행되었고, 예상과 달리 미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JS전자의 생산기술팀은 처음 제안 요청할 때와 달리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추가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미팅이 진행될수록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미팅 중 생산기획팀의 프로젝트 담당자가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keyword
수, 목, 토 연재
이전 09화Episode 1. 사장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