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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사장의 시선

좌절 2.

by 디케이

좌절 2.



열 번의 발표. 열 번의 거절. 책상에서 멍하니 노트북 모니터만 쳐다봤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최영진 팀장은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고, 기획팀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서민우 팀장도 말없이 자리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표정은 깊이 굳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힘들었고,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우리 회사의 가치가 정말 투자 받기에는 부족한 것인지, 우리의 비전이 투자자들에게는 그저 말뿐인 허황된 것으로 보인 것인지, 이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회사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그 순간, 긴 침묵 속에서 최영진 팀장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시 할 수 있을까요, 대표님?”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에겐 그럴 힘조차 없었다. 우리는 실패했고, 그 실패 앞에서 다시 일어설 용기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깊은 좌절과 패배감 속에 투자유치 활동을 마무리했다.


창업 초기, 혼자 투자유치 활동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은 말 그대로 처절했다. 회사의 기술 개발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퇴근 후에도 매일 새벽까지 투자 자료를 만들었고 투자자들을 만나며 비전을 설명하고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전략과 자신감을 설득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영업부터 재무, 회계, 기술 개발, 심지어 마케팅과 최신 트렌드까지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이러다 진짜 박사 되겠네.’ 농담처럼 중얼거렸던 그 말은 어느 순간 현실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인생은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곤 한다. 회사의 생존을 위한 투자가 어느 순간 내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대표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고 외로운 길인지 전혀 몰랐던 때였다.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다시 투자유치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시점이 왔고 열심히 했지만 매번 실패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명확한 투자 필요성과 유치의 자신감이 과거와 달랐기에 투자의 문을 두드렸는데 거듭된 실패가 더욱 아쉬웠고 과거보다 훨씬 힘들게 했다.


그렇게 예정된 IR 발표들이 모두 끝난 후 어느 날 또 다른 투자자의 IR 발표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작정 달려가서 하겠다는 답변을 주지 않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실패를 하는 기간 동안 몸도 피곤했고 자신감도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투자를 받을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지금 이 순간에 투자를 위해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아니지. 이 고민은 벌써 많이 했어. 그러니 지금은 다시 한번 투자유치 발표 준비에 집중해야 해. 아니야, 지금 이 시간에 고객 한 명을 더 만나야 하는 게 나을 듯한데. 또 했다가 잘 안된다면...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질 거야.’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마음속에 맴돌며 나를 뒤흔들었다. 회사가 당장 현금이 고갈된 것도 아니고, 회사 운영이 극단적으로 어렵지도 않은데 굳이 투자유치를 위해 지금 이 순간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힘을 분산시켜야 하는지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올해는 적극적인 투자유치 활동은 더 이상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시간을 다른 사업적인 일들에 더 집중하기로 하고, 내가 직접 발표나 미팅을 하지 않는 범위에서 경영지원팀장이 소극적 투자유치 활동만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정 후에도 내 안의 또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회사의 자금 부족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갑자기 새로운 사업 기회가 나타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CEO(Chief Executive Officer)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투자유치 아닌가?’ 이런 생각들로 나는 며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투자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일이 잘한 건지, 아니면 정리되지 않은 불안한 감정들을 내세워 너무 쉽게 결정을 내려 버린 건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투자유치 활동을 올해는 더 이상 직접 뛰어들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었다.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아플 때면 자주 걸었던 집 앞 경의선 숲길을 또 걸었다.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개운하지. 실패만 경험하다가 도전 자체를 포기한 결정을 했는데...?’ 어제까지의 무거웠던 걱정이 사라지고 이렇게 홀가분해지는 게 신기했다. 결정이 주는 또 다른 힘이라고 생각했다.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더 이상 머리를 아프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 때로는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선택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투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안다. 과거 회사를 세울 때도, 첫 제품을 준비할 때도 투자유치가 절실했고, 어설프지만 열심히 노력했다. 절박한 마음이었지만 현실을 제대로 보지도, 구체적인 미래 청사진도 없었다. 또 이성적이지 못한 태도로 투자자와 미팅도 많이 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투자자들은 절박함에 흔들리는 기업에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대표님! 올해 투자유치는 잘되어 가나요?”


회사의 주주들 중엔 가끔 이런 관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웃지만 속으로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들은 투자유치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를 것이다. 그저 사장이라면 쉽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게 나는 언제나 두렵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사장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올해 투자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언젠가는 다시 투자유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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