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새벽부터 가게에 나가 엄마를 도왔다. 가게 청소를 하고, 진열대를 닦고, 비릿함이 베어버린 가게 입구에 물을 뿌리고 있으면 아버지가 구매한 생선을 트럭에 실어오셨다. 박스들을 내리고, 소금 포대들을 옮기고, 트럭 적재함을 물로 씻어내고 나면, 밥시간이 되었다.
“석이 니 가방 챙기왔제?” 고슬고슬 잘 익은 밥을 퍼며 엄마가 물었다.
“응. 챙기왔다.”
“있다 밥 묵고 나거든 정육점에 가가 거 히야한테 공부 배우고 오니라. 엄마가 미리 다 이야기해놨으니까, 있다 고등어나 한 손 들고 가가 아저씨한테 드리고. 알았제?”
“응...”
장사가 시작될 때, 엄마는 진열된 생선들 위로 소금을 한소끔 씩 뿌리곤 했는데, 포대에 담긴 소금을 바가지로 퍼, 손으로 고르게 펴는 일은 내 담당이었다. 하얀 소금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다보면, 눈길을 걷는 소리, 스파이크를 신고 사박사박 모래 운동장을 걷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 그리움은 학교에 대한 향수와 공부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정육점 큰아들은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대학생이었는데, 군대에서 훈련받다가 다쳐서 의가사 제대를 했다고 했다. 정육점 특유의 붉은 불빛들 사이 돼지와 소들이 쇠고리에 양쪽으로 걸려있었고, 고깃덩어리 사이를 몇 발짝 지나고 나면 형이 머무르는 작은 골방이 나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미닫이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틈 사이로 본 형의 모습은 낯선 이질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니가 석이가?”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하는 형은, 한쪽 다리가 없었다.
“네...”
“새끼~ 니 사고치가 학교에서 짤맀다메. 니 좀 치나?”
“그런 거 아인데요...”
“뭐한다고 그래 서있노 들어온나.” 형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고,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놓인 나는 미닫이문 안으로 들어갔다.
“니 운동했다메. 무슨 운동했노?”
“달리기요.”
“종목이 뭔데? 단거리가?” 달리기라는 말에 형의 시선은 자연스레 나의 다리로 향했고, 두 다리를 가진 나는 그 시선이 다정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미터요...”
“최고기록 몇촌데?”
“12초 8쯤요...”
“와~ 씨발 니 존나 잘 뛰네. 나는 다리빙시라가 100미터 뛸라카면 1박 2일 걸린낀데. 새끼 윽시 좋겠노.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나면 좀 빨리 뛸 수 있겠나”
“인자 뛸 일도 없는데요 뭐...”
“그래도 니는 마음만 무면 뛸 수는 있다 아이가.” 형과의 대화가 지속될수록 마음이 답답해졌다. 내가 잘못해서 형이 다친 게 아닌데도,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는 내가 죄인이 된 거 같았고, 할 수만 있다면 형의 시야에서 내 다리를 가리고 싶었다.
“뜀박질한다고 공부는 영 안 했겠네~”
“원래 좀 돌대가리라가... 공부는 영 안되드라고요.”
“새끼... 한글만 읽을 수 있으면 하는 만큼 나오는기 공부다이. 공부는 니 절대로 배신 안한데이. 니가 딱 하는 만큼만 나온다. 히야한테 배우면 좀 빡실낀데 잘 따라올 수 있겠나?”
“열심히 해보겠심더.”
“낸주 울면서 도망가기 없기다이.”
“네...”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공부의 기초도 없는 내가,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았기에, 누구라도 내게 가르침을 준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해서 맞아봤자, 학교에 수많았던 왕들보다 더 하겠냐는 생각도 있었고, 그래봤자 다리병신이라는 생각도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형과의 수업은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공부에 대한 기초가 흐트러져 중학생의 나이에도 다시 초등학교 교과서를 교재 삼아 공부했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형은 교과목들을 가르치면서 형의 학창 시절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군대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사춘기도 오지 않은 내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군 생활 이야기는 재미없었지만 곧 내게도 닥쳐올 미래였기 때문에 귀담아 들었다.
“닌 나중에 커가 뭐가 되고싶노?”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 따는 게 목표였는데, 퇴학 후에 한 번도 무언가를 꿈꿔본 적이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람 니 공부는 와 하노?”
“엄마가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해야 된다캐가지고요.”
“엄마가 죽으라카면 죽을끼가?”
“그건 아니지만... 형은 뭐 하고 싶은데요?”
“다리 빙시가 할게 뭐가 있노. 이래 살다 디져야지.” 형이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은 하나 있노.”
“누군데요?”
“내 다리 이래 만든 새끼. 그 새끼는 꼭 한 번 만나보고 죽고싶노. 개새끼... 진짜 만나가 칼로 배때지라도 함 쑤시고 싶데이.” 사고가 나서 다친 줄 알았던 형의 다리는, 끈질기게 형을 괴롭히던 군대 선임의 구타 때문이었고, 구타 사실을 상부에 알릴 수 없던 형은 다리 안이 썩어 들어가는 줄 모르고, 참을 수 있을때까지 참다가 병원에 가서야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형은 자주 내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런 형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배가 아파왔다.
“세상에 젱 무식한게 힘으로 해결할라 카는기데이. 힘으로 다 할라카면 글은 와 배우고, 공부는 만데 하겠노. 니도 사고 치봐가 알제? 결국 니한테 아무 도움도 안되는기라. 물론 맞는 새끼는 더 빙신이지만... 암튼 폭력은 나쁜기다이. 니 보이 맞고 다닐 일은 없을 거 같고, 사람은 때리지 말고 살아라. 알았나?”
“그랄일 없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제서야 내가 육상부 주장에게 한 행동들이 폭력이란 걸 깨달았다. 오랜 시간 동안 괴롭힘을 당한 건 나였는데, 그 괴롭힘에서 벗어나려 했을 뿐이었는데... 학교는 왜 내게만 벌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형의 이야기를 듣고, 주전자를 휘두를 때의 내가 떠오르며 잠깐이었지만, 쓰러져 있는 주장의 모습을 보며 손에 남은 쾌감을 느끼고, 잠시나마 내가 우위에 서 있다는 짜릿함을 느끼던 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