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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은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나는, 형과 함께 정육점 골방에서 열심히 대한민국을 응원했다.
“이번에도 허벘다. 하루종일 밥만 쳐묵고 공만 차는데 우째 저래 개발일수가 있노!” 형은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골문 앞에서 공중으로 공을 뻥뻥 차는 선수들을 욕했다.
“그래도 스페인 윽수로 잘한다 카든데, 저 정도면 잘하는 거 아이예요?”
“똥 마려운 개새끼 맨치로 저래 쪼르르 뛰댕기면 뭐하노 골을 넣어야지. 1:0이건, 2:0이건 못 넣으면 그냥 지는기라.”
“그래도 스페인한테 저 정도면 볼리비아랑은 해볼 만한 거 아일까요?”
“가들은 동양인들이랑 운동능력부터 다르다카이.” 0:0으로 전반을 마치고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연속으로 실점을 했다.
“저봐라. 내 저칼줄 알았다. 어쩐지 전반전에 윽수로 뛴다 싶더라. 후반 되디 다리 다 풀 리가 뭐 저카노!” 2:0으로 패색이 짙어진 경기에 형은 조금 흥분했고, 흥분한 만큼 맥주를 더 들이켰다. 대낮부터 마신 술은 후반전이 끝날 무렵 형을 거의 만취 상태로 만들었다.
“씨발. 뭐 잘하는 게 하나도 없노. 나라가 개 같아가 축구도 개같이 하는 거 아이가. 전부다 성격만 급해가 빨리빨리 외치기만 하고, 저거 맘에 안들면 개처럼 두들겨 패기나 하는 개 같은 나라가 잘될 리가 있나! 나라 지키라고 불러제끼고는 적이랑 싸우기도 전에 같은 편끼리 주때리가 사람들 병신 만들고, 씨발!!! 내 다리 돌리도 개씨발새끼들아!” 취한 형은 티비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후반전 종료를 앞두고, 홍명보, 서정원 두 선수의 연속골이 터져 2:2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다. 형과 함께 웃으며 응원을 시작했지만, 경기가 끝난 후,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나는 무승부를 만든 우리나라 선수들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왠지 나도 지금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뭐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형은... 무승부 경기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환호하며 기뻐하는 것과는 달리, 극적인 승부를 펼쳤음에도 형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은 걷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가 펼쳐지던 날, 정육점 양쪽으로 걸려진 고기 덩어리들 사이에 밧줄을 걸고 축 늘어진 형이 있었다.
형은 유서에 자신의 다리를 가져간 나라와, 근무하던 부대의 선임들의 이름 아래 그들이 형에게 가한 폭력에 대한 원망과 저주를 퍼부었고, 내게는 서정원 선수처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되라고 적어놓았다. 그때의 나는 형의 유서에 적힌 이야기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장례식에 가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적 없었던 나는,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법을 알지 못했고, 혹시나 형의 죽음이 내 튼튼한 두 다리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비슷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형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나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점점 거세지고, 집에 다다를 무렵에 나는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사박사박 모래 운동장을 달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