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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빨갱이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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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드레신 Sep 06. 2024

첫사랑(1)

13.

형에게 착실히 기초를 배운 탓에 혼자서도 어느 정도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고, 친구들이 중학교 졸업을 하는 시기에 나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맞는지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를 보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함께 어울리지 못한 2년여의 공백이 선뜻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다시 학교의 왕들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나의 주저함이 더 커졌다. 정육점 형과 늘 함께 보내던 주말 시간은 도서관이 자리를 대신했다. 어릴 적 놀이터였던 집 뒷동네의 산과 부추밭은 도서관과 여성문화센터가 들어왔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도서관은 신세계였다. 교과서 외 책을 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도서관에 있는 갖가지 책들에 매료되었고, 그 책들은 더디게만 가던 내 시간들을 착실히 갉아먹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미정이를 만났다.

초등학교 다닐 때 담 하나를 두고 옆집에 살았던 미정이는 중학생이 되면서 또래에 비해 발육상태가 빨랐고, 빠른 발육상태만큼이나 사춘기도 빨리 왔다. 내가 학교에서 퇴학당할 무렵 미정이는 동네에서 가장 빠른 오토바이를 가진 형의 뒷자리를 꿰찼고, 그 후 몇 개월 뒤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 빨갱이 아이가!” 오랜만에 듣는 빨갱이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내 고개는 돌아갔고, 거기에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미정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어색하게 웃으며 나도 인사를 했다.

“니 학교 짤맀다 카디 도서관에는 웬일이고?”

“그냥 책 좀 빌리 볼라고...”

“우와~ 책도 읽나? 신기하네~ 니 달리기는 인자 안 하나?”

“응. 인자 달리기는 안 하지. 니는 여기 뭐하러 왔노? 공부하러 왔나?”

“하하하하하 미친나! 공부가 웬 말이고 크크크. 나는 볼일이 좀 있어가~ 니 달리기 할 때 좀 멋있었는데 인자 안한다카이 좀 아쉽네. 하기사 빨리 뛰 본들 뭐하겠노, 숨만 차지. 오토바이보다 빨리 뛸 수도 없고. 니 삐삐있나?” 

“아니...”

“뭐고 아직 삐삐도 없노. 심심할 때 같이 놀자칼라 캤디만. 야 니 볼펜 있나?”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볼펜을 꺼내서 건네줬다. 미정이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혀있는 껌 종이에다 숫자 몇 개를 휙휙 적어 내게 건넸다.

“야. 니 심심할 때 음성 남기라. 누나야가 놀아주께. 니 어차피 학교 안댕기가 시간 많을 거 아이가.”

“고등학교는 갈 수도 있다. 이번에 검정고시 합격해가 고민중이고.” 내 말에 미정이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학교는 만데가노. 가봤자 또 담탱이들한테 처맞기나 하지. 니나 마이 댕기라~ 나는 그냥 이래 살란다. 캐가 니 연락할끼가 안할끼가!”

“할게...” 노란 머리에 봉긋한 가슴을 가진 미정이는 아름다운 아가씨 같았다. 껌종이를 받으며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니 안 하기만 해봐라이. 디진다~ 내 기다리고 있으께! 난 인자 가봐야겠다. 꼭 연락해래이!”

“응. 잘가래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통신기 판매대리점에 들러 무선호출기를 구경하고, 엄마를 졸라 빨간색 삐삐를 구매했다.     


공중전화를 통해 흘러나오는 미정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했고, 그 달콤함에 취해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공중전화를 들락거리며 반복해서 그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정작 내가 미정이의 삐삐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길 땐 몇 마디 하지도 못했지만, 그 몇 마디를 하기 위해 내 심장들을 얼마나 빨리 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미정이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고, 미정이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지금처럼 일도 돕고, 공부도 하고싶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속마음은 학교에 가면 미정이와 멀어질까 두려웠고, 학교에 가 있는 시간 동안 미정이와 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결심을 굳히고, 미정이를 만나러 갔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었음에도 미정이는 짧은 핫팬츠를 입고 놀이터 그네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네 아래 늘씬하게 뻗은 미정이의 다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보다 더 세차게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왔나?”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모래에 던지고 발로 비벼 끄며 미정이가 말했다.

“응. 니 안 춥나?” 나는 미정이의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춥긴 뭐가 춥노. 그네 탔디 더워 죽겠다. 한 대 필래?”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내게 담배를 건넸다.

“나는 괜찮데이.” 

“등신이고 아직 담배 맛도 모르고.” 미정이는 장미가 그려진 담뱃갑에서 가느다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를 꺼내는 기다란 손가락도,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 당기는 빨간 입술도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가 맛있나?” 공중으로 도넛 모양으로 담배 연기를 만들며 장난치는 미정이에게 물었다.

“맛으로 피나. 그냥 피는기지. 피다 보면 마음도 좀 착 가라앉는 거 같고. 기분은 괜찮아진다.”

“나도 함 피보까?”

“치아라 새끼야. 니는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 순진하이~ 착해빠지가 담배가 웬 말이고 크크.”

“내가 뭐 순진하노 나도 알 거 다 안데이!”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니가 뭐 아는데?” 내 말이 정말 웃겼는지 미정이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냥 뭐... 나도 알거는 다 안다고. 그라고 내 학교는 안가기로 했다.” 너무 격하게 웃는 미정이의 모습이 보고 괜시리 주눅이 들었다.

“학교 안 간다고? 캄 우짤낀데?”

“그냥 검정고시 준비해야지 뭐.” 내 말에 미정이의 표정이 더 밝아진 거 같았다.

“카면 니 시간 윽수로 많겠네~ 니 여자 만나 본 적 있나?”

“아니.”

“그람 키스 해본 적도 없겠네?”

“어..?? 어??” 키스라는 단어 하나에 내 얼굴은 빨개졌고, 미정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누나야가 갈키주까?”

“뭐라카노! 미친나! 빨리 가자! 오늘 니 시내 나가야 된다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며 미정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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