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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빨갱이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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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드레신 Sep 10. 2024

첫사랑(2)

14.

그 후로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내 일상 속에 미정이가 들어왔고 나는 일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온통 미정이 생각뿐이었다. 

미정이는 가끔 몇 달씩 사라지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연락이 닿지 않으면 나는 공중전화로 가, 매일 미정이에게 재밌지도 않은 나의 일상에 대해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예전에 미정이에게 받은 메시지들을 반복해 들으며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미정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어제 만난 사이처럼 조잘거렸고, 나는 그런 미정이가 좋았다. 미정이는 늘 쉽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 주민등록증과 겨울 내내 연락이 닿지 않았던 미정이의 음성 메시지를 받았다. 

“빨갱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한데이. 잘 지내고 있제? 내일 12시까지 우방랜드 입구로 온나.” 내 삐삐 화면엔 ‘0000’이란 숫자가 찍혀 있었고, 0000의 의미와 짧은 음성메시지는 그 날밤 나를 잠이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팅팅 붓고 초췌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몇 벌 가지지도 않은 옷들을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기도 하고, 평소에 바르지 않던 아버지의 스킨로션을 바르고, 무스로 머리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니 올 어디 가는데?” 

“그냥 볼일 보러.”

“니가 무슨 볼일이 있노?”

“아~ 있다 나도.”

“캐가 어디 가는데?”

“그냥 저쭈 갈데 있다.”

“저쭈 어데?”

“아 쫌! 그냥 있다카이.” 

“니 접때 머리 노라이 물들인 가시나 만나러 가는 거 아이제? 그런 아 만나기만 해봐라이 다리몽댕이를 대반마 확 뿌라뿔기다이. 어데 만날 사람이 없어가 그런 아를 만나고 댕기노!”

“아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카노!”

“모르긴 뭘 몰라! 엄마도 다 안다이!”

“아 됐다마! 나가라 옷 좀 갈아입게!” 엄마는 낯선 내 모습에 평소보다 내게 많은 관심을 보였고, 나는 엄마의 그런 관심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릴 때 가장 예쁘고 누구보다 강한 뽀빠이 같은 엄마보다, 미정이가 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평일 낮 놀이공원 매표소는 한산했다. 미정이는 여전히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핫팬츠를 입고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고 있었다. 

“오~ 빨갱이 일찍 왔네? 오늘 우방랜드에 우리 둘 밖에 없는 거 아니가~ 진짜 사람 없다.” 상큼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미정이가 말했다.

“니는 윽시 오랜만에 연락해가 봐놓고 어제 본 사람처럼 이야기하노. 잘 지냈나? 어디 있었는데?” 다시 미정이를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겨울 내내 연락이 닿지 않았던 미정이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표현을 하면 혹시나 다음에는 연락이라도 자주 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도 있었다.

“머스마가 뭐 그런 걸 꼬치 캐묻노! 이래 봤음 된기지~ 퍼뜩 표나 끊으러 가자. 니 얼마 전에 생일였으니까 오늘은 누나야가 쏜다.” 미정이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 팔짱을 끼고 매표소 입구로 갔다. 팔꿈치에 미정이의 가슴이 닿았고, 말캉한 느낌이 내 뇌를 마비시켜 뭐라도 좋으니 그냥 이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모든 학교가 일제히 소풍을 나온 건지, 놀이공원 안은 교복 입은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다들 비슷한 머리 모양에, 비슷한 교복을 입고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모습사이로 우리 둘이 지나가니, 모든 아이들이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고, 나는 이마와 양 귀 옆으로 식은땀이 송골 맺히고, 배가 아파왔다. 

“절마 저거 빨갱이 아이가?”

“빨갱이? 복암중학교 그 빨갱이?”

“어 맞는 거 같은데. 머리가 기니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호석이 맞네. 옆에는 누고?”

“와.. 존나 섹시하다.”

“니 자 모르나? 윽수로 유명한 걸렌데.”

“진짜? 니 자 아나? 나도 소개시키도 윽수로 맛있게 생깄노.”

“빨갱이 여자친구 아이가? 와.. 저새끼 존나 좋겠노.”

“야 씨발 좀 조용해라. 다 들리겠노. 저거 돌면 우리 다 죽는다.” 아이들의 쑥덕거림이 양 귀에 팍팍 꽂혔다. 

오랫동안 학교를 가지 않았음에도, 어쩌면 오랫동안 가지 않았기에 중학교 1학년때의 사건은 아이들 사이에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년배들 사이 유명인이 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긴장되어 몸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미정이를 바라보니, 미정이도 아이들의 쑥덕거림과 시선이 불편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니 배 안 고프나? 밥부터 무까?” 일단 아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정이에게 물었다.

“아니... 배는 별로 안고픈데... 일단 화장실부터 좀 가자.” 미정이는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화창한 봄 날씨에 눈부시게 핀 꽃나무 아래에서 모든 아이들이 신나게 웃고 떠드는데, 우리 둘의 머리 위에만 먹구름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복통이 점점 심해져 화장실 변기에 잠시 앉았다. 머릿속에 어떤 놀이기구를 탈지, 어떤 길로 다녀야 교복 입은 아이들과 덜 마주칠지를 계속 생각하다 보니 배가 더 아팠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을 무렵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아이들이 화장실로 들어오고 곧 화장실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야 너거 아까 빨갱이 봤나?”

“어 봤다. 키 윽수로 많이 컸데. 글마 학교 댕길땐 쪼매냈다 아이가?”

“별로 크진 않았지. 그래도 윽수로 빨리 뜄다 아이가.”

“싸움도 존나 잘한다메. 1학년때 학교 통 뭇다 카든데.”

“싸우는거 옆에서 본 아들은 다 지맀다 카드라. 완전 피떡 만들어가 경찰 오고 119오고 난리 났다 카데.”

“칼로 찔렀다 카든데.”

“칼 아이고, 팔꿈치로 막 조샀다 카던데.”

“지랄한다 빙신들. 그냥 스파이크 신고 존나 밟았다 카드라. 스파이크에 바늘 같은 거 달맀다 아이가 그걸로 막 존나 밟아가 피떡 만들었다던데. 글마 내랑 같은 학교 나왔다.”

“와 씨바... 존나 잔인한 새끼네. 아까 눈깔 보니까 섬뜩하긴 하더라.”

화장실 칸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무서웠다. 내가 아닌 나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갔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서 빨리 아이들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 옆에는 글마 깔이가? 윽수로 쌔끈하던데.”

“내가 아나 미친새끼. 쌔끈하면 우짤낀데? 빨갱이 옆에 있는데 말이나 걸 수 있나?”

“가도 윽시 유명한 걸레라 카드라. 어디 학교라 카드라. 가도 1학년 땐가 2학년 때 짤맀다 카든데.”

“끼리끼리 잘 만났네. 그래도 부럽노. 학교도 안댕기고. 아~ 나도 학교 때리치아뿌까.”

“때리치우면 니 뭐 할거 있나? 병신새끼 크크”

“몰라 나도 빨갱이처럼 존나 예쁜 여자친구 만들어가 떡이나 치고 댕기지 뭐.”

“와 진짜 맛있긴 하겠더라.” 

“크크 맛있기는 니 여자 만나보긴 했나?”

“와~ 이새끼 뭐라카노. 난 다해봤지.”

“크크 븅신 뭐래노 아다새끼.”

나에게서 미정이로 아이들의 주제가 전환되는 순간, 긴장감과 더불어 분노가 올라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함부로 미정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변기에서 일어나 문을 발로 쾅 차면서 칸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칸 안에서 내가 나오자 어찌할 줄 모르고 서로 눈빛들을 교환하더니, 입을 다물고 화장실 밖으로 나갈려고 했다.

“야 씨발새끼들 어디가노. 너거 거기 서라.” 나의 말에 아이들은 주춤하더니 알아서 일렬로 줄을 맞추고 고개를 숙이고 내 앞에 섰다.

“너거 여서 담배피미 아까 뭐라캤노?” 내 심장도 터질 듯이 두근거렸지만, 최대한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누구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숙인 고개들은 더 아래로 깊이 숙여졌다. 

“아까 너거 주디 잘털데. 다시 함 지끼보라고!” 나의 재촉에 한 아이가 고개를 들고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잡고 사정없이 따귀를 날렸다. 고요한 화장실은 담배연기와 쫙! 쫙! 마찰음만 가득했고, 따귀를 때리며 슬쩍 돌아본 나머지 아이들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거 밖에서 놀고 있는 아들한테 똑띠 전해라이. 오늘 내랑 눈 마주치는 새끼들 다 죽는다고. 알았나?”

“응...” 아이들은 부리나케 화장실 밖으로 뛰어 나갔고, 내 다리도 풀렸다. 화장실 문 앞에는 미정이가 서 있었다. 어디서부터 듣고, 어디까지 본 건지 알 수가 없어 긴장이 됐다. 

“니 변비가! 뭐 이래 오래 걸리노!” 미정이의 농담에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내 변비 아이다. 그냥 오랜만에 학교 댕길 때 친구들 만나서 이야기 좀 했데이.”

“니가 친구가 어딨노! 지랄 내 다 봤그등! 니 사람 윽시 잘 패데.”

“아니다.. 그런거...”

“아니긴 뭐 아니고. 다 봤구만... 빨갱이 니 원래 싸움 잘했나?”

“아니... 싸워 본 적 없는데...” 

“아인데, 아까 보니까 니 윽수로 쎄던데... 니 내 애인해가 나도 좀 지키볼래?” 미정이의 말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볼이 발그레 붉어졌다. 

“니 지키줄 필요가 어딨노! 니는 딱 봐도 윽시 쎄보이가 아무도 니한테 시비 걸거 같지도 않구만!”

“뭐라카노 싫으면 치아라! 문디야!” 미정이는 삐진 척 홱 돌아서서 걸어갔다.

“안 싫다.” 나는 돌아서는 미정이의 손을 잡았고, 미정이는 잡은 내 손에 깍지를 꼭 끼었다. 

그 후 놀이공원 데이트는 너무 재밌었다. 벚꽃은 바람에 날려 비처럼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고 눈부신 햇살은 미정이의 뽀얀 피부와 노란 머리카락을 더 반짝이게 만들었다. 우리가 오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알아서 슬금슬금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피했고, 우리는 타고 싶은 놀이기구도 마음껏 타고, 많이 웃으며 하루를 보냈고,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첫 키스를 나눴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을 때 책상 위에 놓인 삐삐의 진동이 울렸다. 내 삐삐 화면엔 ‘4861004’라는 번호가 찍혀 있었고, 전화기로 확인한 음성 메시지는 평소보다 다정한 미정이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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