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빨갱이 1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드레신 Sep 13. 2024

첫사랑(3)

15.

그 후로, 틈만 나면 미정이를 만나러 갔다. 미정이는 부모님의 집 보다 자취하는 친구들의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더 많았고, 그런 상황은 우리 사이에서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니 또 집에 안 들어갔나! 어디가서 잤는데?” 미정이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알 때마다 내 마음은 뭔지 모를 부글거리는 감정이 생겨났고, 그때마다 취조하듯 미정이에게 물어봤다.

“친구집에서 잤지. 집에 가면 뭐하노!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담배도 마음대로 못 피고. 가봤자 아빠랑 싸우는 거 말고는 할 게 없다!”

“그런 게 어딨노. 담배는 끊으면 되잖아! 부모님 말씀도 좀 잘 듣고. 언제까지 그래 살낀데?”

“와.. 씨발... 빨갱이 니 말 다했나?”

“빨갱이라고 부르지 마라.”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는데 뭐! 왜!”

“내가 왜 빨갱인데. 빨갱이라 부르지 마라. 듣기 싫다.”

“뭐 다 니보고 빨갱이라 카는데. 와 나는 빨갱이라 부르면 안되노. 니 하는 짓이 딱 빨갱이다 아이가. 남들 다하는데 지만 안 하면서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니가 뭔데?”

“나는 니 남자친구다 아이가.”

“하하하하하. 웃기시네. 니가 내 남자친구면 내가 니 말 다 들어야 되나? 이래 답답하게 굴거면 꺼지라 그냥. 니같은 남자친구 필요 없다.”

“아 쫌... 또 왜 그러는데. 내가 잘못했다.” 미정이가 없는 내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은 점점 미정이에 대한 집착으로 번졌고, 나비 같은 미정이는 늘 내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뭐를 잘못했는데?”

“그냥, 다”

“그냥 다 뭐?”

“아 쫌... 그냥 다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안칼게.”

“니가 말하는 그냥 다가 뭔지 알 때까지 만나지 말자. 알았나?”

“아 쫌... 이러지 마라.”

“이러지 말긴 뭘 이러지 마? 니 연락 오면 다 씹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피곤하게 하지 마라.”

“니는 내가 싫나?”

“뭐라노. 진짜 병신같이. 피곤하다 그냥 꺼져라 오늘은.”

“내한테 왜 이라는데.”

“아~! 쫌! 꺼지라고! 니 진짜 내 안 보고싶나?”

“알았다. 알았다. 내 간다. 잘자고 연락해래이.” 이렇게 미정이와 다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미정이가 원망스러웠고, 혹시나 내 곁에서 멀어지는 건 아닌가 너무 불안했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아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할 때면 미친 듯이 괴로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가 내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

“니 정신 안 차리고 또 어디 갔다오노! 엄마가 미정이 만나지마라 캤나 안캤나!” 그 무렵 내 삶의 중심은 미정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말들도 잘 들리지 않고, 엄마에 대한 반항심만 커져갔다.

“아! 왜! 내가 무슨 나쁜 짓 하고 댕기는거도 아이고. 왜 카는데!” 엄마도, 아버지도 늘 날 위해 당신들의 삶을 혹사당하는 거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 살면서 한 번도 두 분에게 대들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미정이를 만나면서부터 엄마와의 관계도 자주 날을 세우는 날이 많았다.

“니 여자 잘못 만나면 진짜 인생 망하는기데이. 니가 지금 여자 만날때가! 검정고시 공부는 하고 있나!”

“내가 알아서 하께! 카고 공부하면 뭐하노! 그냥 나도 생선이나 팔면서 이래 살면 되잖아!”

“뭐라고! 이 문디자슥이!” 엄마의 손이 내 얼굴로 날아왔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뺨을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뽀빠이 나의 엄마는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날 엄마는 한참을 울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그래도 미정이에 대한 내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미정이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미정이네 집, 미정이가 자주 가던 친구들의 자취방 등을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미정이를 찾았지만, 아무도 미정이를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답답하고 그립고. 미정이만 보고 싶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서야 미정이를 봤다는 친구가 나타났다. 미정이의 친구는 내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것 같다고 했고 그만 잊으라고만 했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매일 미정이의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며 사과를 했다가 빌기도 하고, 그러다가 속에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도 하며 연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미정이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왔다.

“오늘밤 9시 우리 가던 공원 놀이터로 온나.” 미정이의 메시지에 아침부터 설레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엄마에게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일찍 들어와 샤워를 하고 옷장을 열었다. 미정이를 만날 때 입으려고 아껴둔 하얀 남방과 잘 다려 줄잡은 아이보리색 면바지를 입고 머리에 무스를 발랐다.       

   

만나면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기분이 풀릴까를 머릿속에 수없이 반복하고 공원으로 가는 길, 꽃집에 들러 빨간 장미도 한 송이를 샀다. 푹푹 찌는 여름 날씨에 땀에 젖은 이마를 연신 닦아내며 공원으로 걸어갔다. 공원에 다다를 무렵 평소에는 공원에 없어야 할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고 그 아이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절마 맞나?”

“맞다. 뭐고 절마 저거 꽃 사들고 온기가 크크. 완전 미칭게이네.”

“옷 입은 거 봐라. 저거 데이트하는 줄 알고 온 거 아이가?” 쑥덕거리며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거슬렸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공원 입구 계단을 오를 때까지 무리 지은 아이들은 계속 나타났고 내 다리는 후들거렸다. 심장은 쿵쾅대며 뛰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미정이를 만나야 했다.

공원 안 놀이터에는 또 다른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다들 타고 온 오토바이 옆에서 담배를 피고 맥주를 마시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중심에 그네를 타고 있는 미정이가 있었다.

미정이를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긴장된 나머지 내 팔과 다리는 뻣뻣하게 움직였고, 히히덕거리는 아이들을 보니 배가 아파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이 빨갱이 왔나~? 존나 오랜만이다 씨발놈아!” 미정이 옆에 앉은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고, 어둠이 깔린 하늘과, 시야를 가리는 담배 연기 때문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그네 쪽으로 내 떨리는 내 다리를 움직이고 담배 연기가 시야에서 조금씩 걷히면서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때리고, 내가 때렸던 중학교 시절 육상부 주장이었다. 

“와~ 씨발놈이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안하네 저거. 히야 보니까 반갑지 않나. 인자 꼬추에 털은 다 났겠다이~! 오늘은 바지 함 벗나?” 그는 웃었고 그를 따라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웃었고, 오로지 나만 웃을 수 없었다. 미정이는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니가 내 여자친구를 그래 괴롭힌다메?” 그의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그의 한 손은 담배에, 한 손은 옆에 앉은 미정이의 허벅지에 손이 올라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야! 박미정.” 나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흩어졌고 내 목소리를 따라 “야! 박미정!” 흉내 내는 아이들,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놀이터에 퍼졌다. 미정이는 그네에서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다.

“뭔데 지금 이 상황. 뭐하자는 건데?” 나는 미정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꺼지라고 했잖아 병신 새끼야.” 미정이는 한심한 듯 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어디가노 얘기 안 끝났다.” 돌아서는 미정이를 잡았고, 그 순간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다.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팔도 다리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폭력으로 얻어낸 내 첫사랑은 폭력으로 끝이 났다.      

이전 14화 첫사랑(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