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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Oct 24. 2020

쉬운 동양 철학 7

순자 VS 송견

사마천은 <<사기>>의 첫 번째 장에서 멸망한 왕조와의 의리를 지키느라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전기를 다루었다. 어차피 누구나 죽지만, 그 명예와 이름은 영원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유학자들의 확신이었던 셈이다.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명성이 칭송되지 않을까 걱정한다"라는 구절은 <<논어>><위령공> 편에도 등장한다. 명성과 명예에 대한 유학자의 관심이 이처럼 분명하게 피력되는 글도 없을 것이다. 결국 사마천은 후대 지식인들에게 명성과 명예를 위해 부귀나 생명 따위는 버려도 된다는 묘한 풍조를 만든 역사가였던 셈이다.

순자도 인간의 본질이 인정 욕구에 있다는 점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다. 심지어 순자는 제대로 인정을 받으면 지배층이 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기까지 한다. 군자와 소인, 혹은 대인과 소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에 대한 윤리적 레토릭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사회적 분업론에는 커다란 사람이 작은 사람을 이끌고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론이 전제되어 있다. 대인이 커다란 이유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인이 작은 이유는 그가 공동체에 살면서도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자나 맹자처럼 순자의 생각도 순진한 생각, 혹은 이상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다. 현실은 강력한 무기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순자는 일종의 유학 버전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누구라도 먼저 의로움을 앞세우고 이로움을 뒤로하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이 투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는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타인에게서 인정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인정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 즉 대다수 소인들을 지배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대인과 소인의 관계는 뒤집어질 수 있다. 피지배자들이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피지배자들 중 누군가가 의로움을 앞세우는 인정투쟁에 성공한다면, 그가 이제는 대인이 될 것이고 전체 공동체 성원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버전의 인정투쟁을 집요하게 주장했던 순자의 최고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송견이다. 송견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은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때 인간은 고대하던 영예를 얻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 인정은커녕 모욕을 당할 때, 우리의 인정 욕구는 여지없이 좌절된다는 데 있다. 이어서 자신을 모욕했던 타인과 목숨을 건 보복행위가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 송견은 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다툼의 원인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학자들이 긍정했던 인정 욕구, 나아가 인정투쟁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누군가 모욕을 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행동이 영예로운가, 아니면 치욕스러운가 여부는 개개인이 아니라 특정 체제가 규정한 것이다. 그러니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송견의 주장은 매우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명예와 치욕을 가르쳐 주었던 상과 벌, 혹은 등수를 매긴 성적표를 생각해보라. 결국 1등이란 영예를 얻기 위해 혹은 꼴등이란 치욕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동료들과 경쟁했던 것이다. 모욕당해도 치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송견의 주장은 상호 파괴로 귀결되는 일체의 경쟁에 대한 거부 선언이자,  동시에 우리를 훈육하고 지배하려는 체제에 대한 반역 선언이었던 점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뒤 전쟁은 기본적으로 자본이 자신의 침체로부터 벗어나려는 맹목적 충동 때문에 벌어진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전쟁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군주의 명예욕, 그러니까 자존심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저잣거리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민중에게나, 대규모 살육전을 감행하려는 군주들에게 송견은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마디로 타인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내재화된 체제의 명령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송견은 자신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질 때, 전쟁을 감행하거나 군비를 증강하려는 의지 자체가 사라지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전에 “존경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열등감의 표현이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정투쟁이 존경에 해당하는 것 같다. 송견의 지적처럼 남들보다 잘나야 한다는 경쟁심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게 만들고 결국 갈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정 욕구가 개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특정 체제가 규정한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일제에 맞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의사들의 희생은 특정 체제가 규정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인정을 받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전에 조선의 충(忠)과 일본의 충(忠)을 비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일본의 충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것인 반면에 조선의 충은 윗사람이 틀린 말을 하면 “님 도르신?(미쳤나요?)”하고 끌려가면서도 “님 진짜 도르신?(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끝까지 그러다가 죽는 것이라고 했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 순천 박씨답게 잘 못된 것은 잘 못되었다고 말하고 잘 된 것은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송견의 초상화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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