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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Oct 26. 2020

쉬운 동양 철학 9

혜원 VS 범진

혜원은 현실적으로 정신이 외부 대상에 반응을 하며, 동시에 관념들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어서 그는 특정 외부 대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혹은 특정 관념이 없어진다고 해서 정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나의 관념이 사라진다고 해서 나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멸하는 정신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윤회하는 것일까? 만약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강하다면, 우리의 정신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는 뱀의 몸에 깃들 수도 있다. 이것이 혜원이 윤회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혜원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불과 장작은 관계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A라는 장작에 붙어 있는 불꽃이 B라는 장작으로 옮겨가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만들면서,  그는 정신도 A라는 육체에서 B라는 육체로 건너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A라는 장작이 불로 전소된다고 해서 불 자체도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의 정신도 소멸된다고 믿는 것 역시 매우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얼핏 들으면 혜원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다른 장작에 옮겨지지 않고,  그냥 장작과 함께 소멸하는 불도 있지 않은가? 또한 불이 옮겨지는 장작은 일종의 시신 같다는 인상도 든다.

혜원의 논의는 본의 아니게 육체에 비해 정신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사실 시들고 마른 장작이 더 밝은 불빛을 내니, 몸이 약해질수록 정신이 밝아진다는 혜원의 생각은 그야말로 기독교적 논의로까지 확장될 여지도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심신관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대학>>에는 ‘심광체반(心廣體胖)’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마음이 넓어지면 몸도 비옥해진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의구심이 든다. 불과 장작의 비유만으로 중국인들에게 윤회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을까? 더군다나 윤회설을 부정할 수 있는 비유 역시 어렵지 않게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민한 범진은 정신의 불멸성을 논증하기 위해 혜원이 제안했던 불과 장작의 비유를 부정할 만한 또 다른 비유 하나를 예로 든다. 그것이 바로 ‘날카로움’과 ‘칼날’의 비유이다. 사실 불과 장작의 비유는 정신의 불멸성을 설득하는데 매우 매력적인 비유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장작 A에 붙은 불을 장작 B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진은 혜원의 비유를 파기하고 새로운 비유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에게 ‘칼날’은 육체를 ‘날카로움’은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칼날’을 제거하면 ‘날카로움’은 존재할 수가 없고 ‘날카로움’을 제거해도 ‘칼날’역시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비유를 통해 범진은 중국인의 전통적인 심신론, 즉 “정신은 곧 육체이고 육체는 곧 정신”이라는 관점을 옹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범진의 비판적인 주장을 불교계라고 그대로 받아들였을 리 없다. 그러나 비판자든 혹은 이에 대한 또 다른 논쟁자든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불교=윤회설’이라고 생각했던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범진은 유학의 귀신 및 제사 논리가 민중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사람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성인의 배려였다고 말한다. 분명 효과적인 반론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정신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는 범진의 주장이 그로 하여금 자신을 포함해 전통 유학자들이 숭상해온 제사마저도 현실적으로 새롭게 독해하도록 강제했다는 점이다.

몸이 약해질수록 정신이 밝아진다는 혜원의 생각에 동의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그동안 믿어왔었는데 아프게 되니 멀쩡한 건 정신뿐이더라. 그럴수록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 궁리를 하게 되는 거다. 불교의 철학이 예전에 건강했던 모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금의 삶을 긍정하라는 고통으로부터의 회유라고 들었다.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육체적인 해결책은 없어 슬프다.

범진의 사상에서는 윤회설을 부정하고 지금의 삶을 긍정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전에 힘들어 죽고 싶었을 때 죽고 나면 삶이 리셋되고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회설을 부정하니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내세의 삶이란 없어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혜원의 목각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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