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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Oct 29. 2020

쉬운 동양 철학 12

지눌 VS 성철

1170년에 고려는 무신정권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당시 대각국사 의천으로 상징되던 고려의 불교계도 이런 혼란한 정국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지눌은 이렇게 자기 파괴적으로 갈라진 정(定)과 혜(慧), 즉 선종과 교종을 다시 접목시키려 했던 불교 사상가였다. 무엇보다도 지눌은 자신이 속한 선종의 폐단, 즉 ‘멍청이 선’의 치명적인 맹점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것은 상대편 교종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적인 이해의 중요성을 일면 부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멍청이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멍청이 선’은 ‘지혜로운 선’으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서 지눌은 종밀의 불교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필요성을 느낀다. 혜능의 제자였으며 동시에 혜능을 육조로 승격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신회는 불행히도 후대 선불교 사상가들에 의해 지해종사로 폄하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불립문자’를 슬로건으로 삼고 있는 선사(禪師)들에겐 지적인 이해, 즉 지해(知解)를 추구했다는 불명예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종의 상황을 개혁하려던 지눌이 이론적으로 의지하고자 했던 종밀은 바로 이 신회의 관점을 계승한 불교 사상가였다. 그렇다면 종밀의 이론 가운데 어떤 측면이 지눌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종밀의 돈오점수 관점이었다. <<선원제전집도서>>에서 종밀은 “햇빛이 단박에 출현해도 서리는 점차로 녹고, 광풍이 단박에 멈추어도 파도는 점차로 고요해진다"라고 말했다. 종밀이 강조했던 단박의 깨달음, 즉 ‘돈오’는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완전한 깨달음은 오직 서리가 모두 녹고, 파도가 완전히 고요해진 뒤에나 올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종밀이 말했던 햇빛의 출현으로 상징되는 돈오는 지적인 통찰을 의미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지눌은 종밀의 돈오점수 이론 가운데서 선종 특유의 병폐, 즉 ‘멍청함’을 치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나자고 해도 그다음 날 실제로 일찍 일어나기는 힘든 법이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 즉 정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육체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벌어지는 일상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몸에 각인된 오래된 습관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오래 노력해야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지눌에게 돈오는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적인 통찰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점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습관으로 물든 몸을 한 번에 바꾸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실존 자체를 바꾸려는 지속적인 노력, 즉 불가피하다. 이런 이유로 지눌은 점수(漸修)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철에게는 이론과 실천, 정신과 육체, 돈오와 점수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단지 지적인 이해, 혹은 사변적인 성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성철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종밀과 지눌의 돈오점수 이론이 ‘불립문자’와 함께 선종의 핵심 테마라 할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철은 망념과 자성의 이분법을 견지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그는 때가 낀 거울과 맑은 거울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때가 모두 제거되면 거울은 바로 자신의 본래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역으로 거울이 본래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면, 이것은 곧 거울에는 때가 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선을 통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보게 되었다면, 이것은 동시에 자성청정심을 덮고 있던 망념들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철의 확고한 신념이었던 것이다.

결국 지눌에겐 돈오라는 것은 ‘자신이 자성청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성철에겐 ‘실제로 자신의 자성청정심을 본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적으로 이해한 것과 실제로 경험한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자성청정심을 실제로 본 사람에게는 망념이 더 존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에게 지적인 통찰이란, 그것이 자신이 자성청정심을 가지고 있다고 알게 된 통찰이라도 일종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자적 엄밀함을 눈여겨본다면, 성철이 지눌을 공격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성철의 말대로 지눌이 “하택(신회)은 지해종사니 비조계적자” 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눌이 이야기하려고 했던 논점은 결국 그럼에도 신회나 종밀의 지적인 통찰이 “깨우침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택신회는 지해종사여서 비록 조계의 적자가 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지적인 통찰이 고명하고 이론적인 분별이 명료하여 종밀선사가 이를 계승하였다"라고 지눌이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성철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철이 지눌을 인용했던 방식을 일종의 방편에 불과하다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변명이 불교계에서도 통용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다면, 세간의 학자들도 비판의 화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지눌의 철학에선 먼지 이론(Dust theory)이 생각났다. 장롱 밑은 하루하루 지나도 먼지가 쌓이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보면 먼지가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매일매일 습관처럼 해온 노력들은 지금은 쌓이는 것 같이 보이지 않겠지만 시간이 흘러도 노력이 계속되었다면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의 작가가 되기 위해 이처럼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철의 인용 오류에서는 악마의 편집 희생양들이 떠올랐다. 쇼미 더 머니에서는 해시 스완이 래퍼 진돗개를 뽑을 당시에 “편하게 가려고 쉬운 사람 뽑으려 했다가 막상 하려니까 생각이 바뀌어서 잘하는 사람 뽑았습니다.”라고 했지만 편집이 잘못되어 “편하게 가려고 쉬운 사람 뽑으려 했다.”까지만 방송되어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일도 있었다.


지눌의 초상화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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