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a p Nov 06. 2020

쉬운 동양 철학 20

박종홍 VS 박동환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기초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박종홍은 국가주의자로서 분명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서양철학 수입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을 주된 수입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헤겔의 역사 철학에선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던 개체들이 절대정신을 위한 단순한 매체들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개인들은 더 큰 정신을 발화시키는 밀알들에 불과하다는 생각, 분명 국가주의 또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는 이와 같은 헤겔의 위험한 발상을 박종홍은 별다른 저항 없이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박종홍은 궁핍했던 대한민국을 외양으로나마 부르주아 국가로 만들고자 조바심을 냈다. 이런 그에게 헤겔은 철학적으로 커다란 힘을 주었다. 역사는 끝없는 자기부정의 여력으로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궁핍한 조국도 언젠간 서양에 비견할 부르주아 국가로 환골탈태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박종홍의 속내가, 18세기 후반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너무도 낙후된 자신의 조국 독일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그토록 바랐던 헤겔의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박종홍의 속내는 더 명확해진다. 과거 전통의 모습은 보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 덧없는 개체의 자기주장을 넘어서 진정한 정신의 자기주장을 실현하는 것. 바로 이 대목에서 박종홍은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개발독재’의 이념과 서로 만나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 그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데 깊이 연루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헤겔의 철학에 따라 역사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과거의 보존이면서도 동시에 극복의 과정이라고 보고, 동시에 이러한 과정에서 개체들은 정신의 매체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이제 박종홍에게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민족’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내 박정희와의 만남을 통해 개체 정신이 민족정신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고, 심지어는 개체의 체력마저 국력으로 환원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민족중흥의 철학적 근거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를 과거 500년 동안 정신적으로 지배해왔던 주희의 철학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박종홍은 주희의 철학도 철저하게 헤겔식으로 재해석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타당함을 알리려 했다. 박종홍이 주자학에서 유독 강조된 본성(性)이나 이(理) 개념을 이제 자신의 현상태를 부단히 극복하는 부정성으로 독해했던 까닭은 <<주역>>에 등장했던 변화의 철학이었을 것이다. <괴사>에 나오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구절은 ‘낳고 낳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주희의 철학에서 성(性)이나 이(理) 개념이 과연 부정성이나 운동성으로 사유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이나 이 개념은 주자학의 경우, 변화 혹은 운동과 무관한 세계의 절대적 본질로 간주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점은 박종홍에게 헤겔과 주희로 대표되는 동서양의 양대 사유가 모두 과거의 극복과 보존이라는 부정성의 논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 점이다.

서양철학 1세대들이 국가주의 철학자로 혹은 서양철학 수입상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정치권과 대학을 배회할 때, 서양철학 1세대들과는 다른 길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던 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박동환이다.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박동환은 기존 세대들과 좀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국가주의 철학자의 길도, 혹은 서양철학 수입상의 길도 던져버리고 제3의 길을 걸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숙고하는 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풀어간다. 박동환의 철학은 매우 자명한 한 가지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자신이 수입했던 외래 철학들을 한 번도 진지하게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당 제국에서 화엄종, 천태종, 선종이 수입되어 당시 우리 지성계를 지배했고, 조선시대에도 송 제국에서 수입된 주자학이 우리 지성계를 절대적으로 지배해왔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이념의 변동에 따라 한반도 지성계의 지적 패러다임 역시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곤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삶에서 불교나 유학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우리가 불교나 유학을 극복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친 문명이 중국에서 서양 문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는 우리 지성계에서 독일 철학이나 영미 철학이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물론 이것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의 영향으로 독일 철학을 배웠던 우리 지성인들,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우리 지성인들의 국내 귀환 때문이었다. 박동환에 따르면 과거 동양철학은 공동체의 삶에서 서로 다투지 않는 것, 즉 집체부쟁(集體不爭)을 이념으로 해온 것이다. 집체부쟁!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개체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는 다툼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어서 박동환은 서양철학의 이념을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철학은 공동체의 삶에서 성원들의 잘잘못을 따지고 가장 올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논의하는 정체쟁의(正體爭議)를 이념으로 삼아왔다. 이것은 ‘문제가 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다툰다.’가 된다. 박동환은 공동체에서 다툼 현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철학이나, 혹은 개인들의 다툼을 통해 정의를 확보해야 비로소 공동체가 건강해진다고 보는 서양철학이 모두 특정한 공동체를 전제하는 사유 전통임을 지적한다. 두 주류 철학은 아무리 보편적 사유라고 주장하고 있더라도 모두 특수하고 제약된 사유 전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의 담론을 채택하여 삶을 영위해온 한국 사유의 탄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마치 다양한 소라 껍데기를 구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소라게처럼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늘 생명 개체로서 사유해왔고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만드는 한국 철학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하여 원효대사의 사상과 최제우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원효대사는 해외 유학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철학을 찾았다. 저잣거리에서 민중들과 함께하며 열반에 이르면 타인의 상처가 더 잘 보인다는 해답을 찾았다. 최제우 역시 처음에는 천주교 사상을 가져왔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맞게 바꾸어 일반 백성도 앞에서 이끄는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지 않은가.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것을 창출하면 된다. 나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글을 못쓴다. 아주 힘든 상황이 닥쳐와 그것을 극복해야 할 때나 밑바탕이 되는 글의 재료 (ex: 아팠던 상황이나 지금 참고하고 있는 책 같은)가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재료를 구할 때 일시적으로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의 담론을 채택하여 삶을 영위해가는 한국 사유의 탄력성처럼 말이다.


박종홍 철학자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이 자료는 저작권법과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으니 무단복제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쉬운 동양 철학 1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