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트랄 Sep 22. 2024

Ep2. 4개 국어 소년, 20억을 만날 세계

우리 아이의 파랑새는 무슨 말로 지저귀고 어디에 있는가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것은 그 어느 쪽을 택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아이를 위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할 때, 따로 올바른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있는 게 아니다. 마음 딱 다잡고 언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건, 언어보다 아이의 마음을 지키겠다고 생각하고 돌아나오건, 어느 쪽으로 가도 문제는 발생하게 마련이며,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엄마가 정확히 인지하고 아이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길을 나아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유치원이나 비싼 학교를 선택한 걸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없다. 오히려 문제는 그 이상적으로 생각되는 교육 기관에 아이를 보내는 첫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울면서도 순응을 한다. 어떤 날엔 분명 울음을 뚝 그칠 것이다. 어떤 날엔 분명 그 조그만 귀에 말이 들리길 시작할 것이다. 어른들이 외국어 공부를 했던 경험을 살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말도 잘 안 터지고 귀에 잘 들리지도 않던 외국어 문장들이 계속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어느 날 탕 하고 마음 속에 들어올 때가 있다. 아, 나 말이 늘었구나! 하고 기뻐하게 되는 순간을 심지어 한국어 공부를 하던 학창 시절에도 우리는 겪어본다. 외국어 공부를 하는 어린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남녀노소 동서고금 다 비슷하다.


심사숙고 끝에 나는 한국어로 교육하는 유치원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몇 개 유치원 중 영어와 중국어를 어느 정도 가르치는 곳을 택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만일의 경우 중국어는 배우지 못해도 괜찮다고 마음을 접었다. 아이가 울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길 바랐다. 벌어지는 상황을 언어로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그래야 하루하루가 본인에게 의미 있는 삶으로 다가올 수 있지 않겠나. 어린이도 제 삶은 힘들다. 어른의 눈으로 내 돈 버는 삶은 버겁고 어린이 니 삶은 하루 종일 노는데 뭐가 힘들어 하고 말할 일이 아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울고, 어린이는 힘들 제 하루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영리하고 예민한 아이들일수록 더 많이, 더 오래 운다. 이 시절 네 살 짜리 아들과 함께 낯선 중국을 겪으며 뼛 속 깊이 깨달은 사실들이다. 


나는 그렇게 언어 공부보다 정서 함양을 더 우선순위에 놓기로 결심했고, 아들을 위해 새로 유치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들은 반 년 정도 그 영어-중국어 이중 언어 유치원을 다녔고, 그 와중에 두 나라 말이 다 늘었다. 에미 마음을 아프게 한 어린 눈물이 헛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 다음 유치원을 다니게 하는데 양분이 됐다. 그러나 실력이 이렇게 자랐는데 조금 더 다니게 할 것 같은 후회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기 딱 좋은 때이고, 약간의 준비가 된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들은 이미 영어와 중국어를 외국어로 받아들이는 성장 단계에 와 있었다. 상하이에서 관찰하고 겪은 바에 따르면 우리 나이로 대여섯 살 전후가 지나면 벌써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외국어로 습득하게 되는 거 같았다. 우리 아이보다 한 살 많은데, 삼중 언어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중국계 미국 아이가 언어치료를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동생들은 좀 더 어릴 때 중국에 들어온 덕분에 좀 더 편하게 말을 구사할 수 있었다. 셋째는 거의 완벽하게 삼중 언어를 구사했는데, 만 세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았었다. 이처럼 심지어 한 가정에서도 아이들마다 다 사정이 다를 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부터가 완벽한 다중 언어 구사자가 아니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영어로 소통하길 시작했고, 중국어는 서른 살에 시작해서 마흔이 넘어서야 중급을 넘어섰다. 상당 부분 과정과 결과가 엄마한테 달렸고, 엄마가 알고 있는 수준을 넘기는 게 매우 어려운 과제로 생각됐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아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외국어 공부를 거의 평생 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아들은 만 22개월 정도에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가능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21개월 정도에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말을 따라한다 싶더니, 아들은 자신감을 갖고 여러 가지 한국어 단어들을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당시 한 단어씩 말하는 것이 가능했고, 아직 단어를 두 개씩 붙여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어로 말문이 터진 지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 의미 없는 단어들을 붙여서 대화를 위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다가 중국에 잠시 갔을 때, 예예(爷爷,할아버지), 나이나이(奶奶,할머니), 보보(伯伯,큰아버지)를 중국말로 수줍지만 분명하게 불렀고, 엘리베이터가 "따올라(到了,도착했습니다)하고 소리를 내자, 첫 날은 따 - 둘째 날은 따올 - 셋째 날은 따올라 이렇게 천천히 말을 연습해 나갔다.


이 즈음 아들은 니하오你好, 짜이찌엔再见, 쎼쎼谢谢를 추가하면서 중국어 입문을 완성했다. 만 두 살 아들은 당시 단어의 첫 음절이나 마지막 음절만을 발음하기 시작하여 단어를 구별했던 지라, 위의 단어들을 니! 짜! 씨! 이렇게 발음했다. 무척 귀여웠던 것은 처음 보는 한국어를 접할 때와 비교해서 처음 보는 중국어를 발음할 땐 어쩐지 자신감이 줄어서 살짝 속삭이듯 발음한다는 것이었다. 아기가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분한다는 표시이므로 나는 그것이 기특하고 귀여웠다. 이 중국어 세 마디가 완전한 단어로 완성될 즈음 아들은 진짜로 중국에 건너가서 살게 되었고, 중국어의 홍수 속에서 눈물 한 번 세게 쏟은 것이었다. 


전원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아이가 말수 자체를 잃어가는 것도 큰 이유가 됐다. 아이는 영어와 중국어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짧고 귀여운 한국어로 작은 새처럼 지지배배거리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그럭저럭 한 달 후 아들이 겨우 눈물을 그치자 원장 선생님은 아이가 적응을 아주 잘한다고 추켜 세웠다. 지금 누굴 속이려는 거요. 내 눈엔 모든 걸 포기하고 시들어가는 아이만 보이는데.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내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 당시 아들은 미소를 잃고 말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산소호흡기를 댄 것처럼 살았다.


한국에 가서 설날을 보내며 중국에서 힘들었던 기억을 희석할 요량으로 아이가 실컷 놀게 해 주었다. 그러고나서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새롭게 한국식 유치원으로 애를 들여보내던 첫 날, 아이는 또 무서운 곳으로 끌려가는 건가 하면서 뒤를 돌아보며 엉엉 울었다. "엄마, 나 그냥 다니던 데 다닐게"라는 말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달래주며 말해 주었다.


"엄마 한 번만 믿어봐. 엄마, 너 힘들지 말라고 여기 고른 거야. 너 분명 여기 좋아할 거야. 여기 한국말로 공부하는 데야. 오늘 하루만 딱 다녀오고 그래도 너무 힘들다면 원래 다니던 곳으로 돌아가자. 엄마가 약속할게." 그 말에 아이는 울먹울먹하면서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며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 날 하루를 조마조마하게 보냈다.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귀가할까. 잘 보냈어야 하는데. 나는 과연 잘 선택한 것일까? 내가 바라는 대로 내 아이가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까? 만일 여기서 내가 또 실수를 했더라면, 아이에게 맞지 않는 곳을 찾아서 옮겼더라면, 아이는 유치원을 믿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와의 신뢰 관계도 금이 크게 갔을 거라 생각한다. 선택이 잘못 되는 바람에 이 쪽 방향으로 갔더라면 돌이키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눈 앞에 놓은 양갈래 길에 덤불이 무성한 가운데, 좀 더 김치 냄새가 나는 쪽으로 발을 옮겼달까. 한국인의 정서를 따라서 발을 옮긴 순간이었다. 


그 날 오후, 아들은 발걸음도 경쾌하게 하원했다. 유치원 대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뛰어나와 안기면서, “엄마, 사랑해!” 라고 크게 외쳤다. 내겐 그 말이 “엄마, 나 살았어!”로 들렸다. 모국어로 생활하는 유치원이 우리 아이에게 딱 맞는 선택임이 증명됐다.


영어랑 중국어는 에라 몰라,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해. 당장 아이랑 나랑 지금의 행복을 좇아가기로 했다. 행복의 파랑새는 원래 옆에 살고 있는 것 아니었던가? 아, 엄밀히 말해서 한국어로 지저귀는 파랑새가 옆에 있었다. 영어로, 중국어로 노래하는 파랑새는 좀 더 천천히 찾아보는 걸로 정했다. 어디에 있겠지 뭐. 설마 없겠어?

작가의 이전글 Ep 1. 4개 국어 소년, 20억을 만날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