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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랄 Sep 22. 2024

Ep3. 4개 국어 소년, 20억을 만날 세계

신나게 잘 배운 어린이집 파닉스로 영어의 뿌리를 내리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아들의 영어 공부는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 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직하기 위해 아직 18개월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을 때, 방과후 영어 교육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한편 놀랐고 한편 걱정도 했었다. 고작 우리 나이로 세 살인 데다가 한국말도 잘 못하는 어린 아들이 영어를 배워도 될까? 내 자신부터 이십 대에 영어와 일어를 같이 공부하며 혼란을 느껴서 일어를 포기한 적이 있었고, 삼십 대에 중국어를 공부하며 고전한 적도 있었기에, 어린 아들이 언어를 일찍부터 배우는 것에 대해 아무래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는 곧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어린이집 영어 교육이란 것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엄청난 수업 과정이 아니었고, 아이들에겐 그냥 글자 모양으로 생긴 장난감을 이용한 놀이에 가까웠다. 어린이집에서 세 살부터 네 살까지 방과후 영어를 배운 아들은 영어 시간을 제일 좋아했고, 영어 선생님을 아주 잘 따랐다. 어린이집의 정규 선생님이 아니고 어린이집 마다 돌면서 출장 교육을 했던 그 영어 선생님이 고마워서 얼굴도 한 번 못 봤지만 선물을 전달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다섯 살 된 아들이 유치원에 진학했을 때 이제 재밌는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인가 잠시 걱정을 했지만, 또 감사하게도 아들의 "영어 선생님을 잘 만나는 행운"이 계속 되었다. 이번에도 영어 선생님이 정말 잘 가르치시는 모양인지, 아들의 영어 발음과 단어 실력이 나날이 부쩍 늘어가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아들은 영어 시간을 제일 좋아했고, 영어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좋아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막아도 신나게 하게 마련이다.


얼마나 영어 수업을 좋아했냐면, 방과후 교육 프로그램 설명서를 펴 놓고 "블록, 축구, 미술, 그리고 영어 등이 있어, 뭘 할래?" 하고 아들에게 물었을 때, "영어!"하고 즐거워할 정도였다. 사실 유치원에서 영어 수업은 여섯 살 짜리들을 대상으로 연 것이었지만, 아들이 하도 원해서 아들과 아들 친구 중 원하는 다섯 살 짜리들도 그 수업을 듣게 됐다. 그 영어 선생님은 정말 열의가 있는 분이셔서 나중에 학부형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이들이 어떤 태도로 어떻게 수업을 즐겁게 해 나가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고 꼬마들이 수업이라고 할 게 뭐가 있다고! 하지만 선생님도, 학부모도, 모두 진지하게 임했던 상담이었다. 우리가 만났던 그 두 분의 영어 선생님을 비롯해서 일선에서 꼬마들을 진심을 다해 가르쳐주고 계신 우리나라 유아영어교육자분들께 정말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뜻하지 않게 훌륭한 영어 교육을 접하게 되면서, 영어를 가르치지 않고 국어에만 집중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내 원래 방침이 일부 수정되었다. 엄마와의 한국어 책 읽기, 우리말로 말하며 교감하기는 계속 진행하되, 한참 흥미를 갖는 영어도 어느 정도 병행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배운 영어 방과후 교육" 덕분에 내 교육 철학이 수정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좋아하던 시청각 교재를 이용해서 집에서 파닉스 교육을 병행했다. 딱히 어마어마한 것은 아니고 아들이 영어 노래로 구성된 파닉스 교육을 볼 때 억지로 끄거나 방해하지 않고, 잘한다고 칭찬해 주며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놀아준 수준이다. 가끔 틀리는 발음이 나올 때 혀의 구조를 활용해서 교정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혀의 구조를 활용하는 것도 대단한 것은 아니다. 영어를 공부할 때 기초과정에서 원어민 선생님들에게 배운 기술을 활용한 것인데, 소위 메카닉스 mechanics라 하여 혀의 위치를 제대로 놓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발음을 구사해내는 기술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의 L은 발음할 때 혀가 앞니의 끝쪽에 닿게 된다. 이에 반해 한국어의 ㄹ은 앞니의 뒷쪽에 닿으면서 소리가 난다. 혀를 기준으로 보자면 ㄹ이 L을 발음할 때보다 좀 더 뒤로 끌어당겨지는 느낌이 난다. 추가로 (거의 모든 한국인을 고전하게 만드는) R은 혀를 말아올려 넣는데, 어떤 이빨도 닿지 않아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아들의 파닉스가 완성되어 갈 즈음 우리는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던 아빠에게로 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한국어를 안 쓰는 유치원에 갔다가 아들이 정서적으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한국어를 주로 쓰면서 영어와 중국어를 병행하는 유치원으로 옮긴 것이었는데, 우리 아들에게 잘 맞는 선택이었다.


물론 정서적으로 버틸 수 있는 아이라면 계속 외국어에 강하게 노출시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영어를 잘 못하지만 밝고 활달했던 한국 어린이가 영어 인터뷰에서 교장 선생님 무릎에 애교스럽게 앉았다가 붙기 어렵다고 소문난 영어-중국어 이중 언어학교에 합격한 경우도 보았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어린 시절을  잘 버텨내고도 열 살 가량이 되었을 때 틱이 온 경우도 보았고, 한국어를 전혀 안 쓰는 학교만 다니던 아이가 열다섯 살 즈음엔 아예 병원에서 약을 받아 먹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외국어를 다 잘하지만 감정이 무감각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마다 다 적응 형태가 다르고 결과치도 다르게 나오는 것이니 곁에서 부모가 잘 지켜보고 때에 맞춰 적절하게 대처해 줘야 한다.


다행히 아들은 재빠른 전원이 맞는 선택이었던 덕분에 상하이의 두 번째 유치원에서도 여전히 영어를 좋아했다. 영어 원어민 선생님이나 중국어 원어민 선생님과도 수월하게 소통하면서 유치원에 잘 다녔다. 잘 모르면 한국어로 물어볼만한 선생님이 여러 곳이니 아마 마음이 편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밥이 한국식으로 나와서 아이가 너무 맛있고 좋다고 했다. 먹는 게 또 잘 맞으니 아이가 맘 편히 배우는 데에 도움이 됐다.

집에서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초반에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다. 만 네 살 짜리를 키우는 초보 엄마다 보니 모르는 게 많았었다. 영어 숙제를 함께 해주는 한편, 여러 형태의 사교육도 알아보았다. 학원에서 제공하는 시범 수업들을 들어보거나 잘 가르친다는 과외 선생님에게도 몇 번 배워 보았다. 좋다고 소문난 여러 방법들을 이래저래 써 보았으나 아들은 이런 주입식 교육들에는 금방 싫증을 냈다. (언어는 한국어가 편해도 교육은 외국식으로 받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 버렸나 보다.)


싫어하는 것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게 내 방침인 지라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아무래도 외국에 살고 있는 지라 영어를 안 가르칠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 부부가 둘 다 영어로 업무를 하다보니 업무 관련 대화는 영어로 소통하고 있는 지라, 향후 부모와 소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아들이 영어로 말할 줄 알 필요가 있었다. 부모 둘이 말할 때 아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끔 일부러 영어로 대화를 할 때도 있었다. 아들이 저 혼자 못 알아 듣는다는 사실이 싫어서라도 영어를 더 익히려 들길 바랐다. 그리고 영어가 그리 멀리 있는 언어가 아니라 집에서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언어라고 아들이 인식하길 바랐다.


그렇게 좌충우돌 시행착오와 크고 작은 행운 사이를 오가면서 아들은 만 다섯 살이 되었고, 어느새 영어(하)반에서 영어(상)반으로 승급하게 됐다. 아들이 영어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 첫 번째 중요 전환점을 무사히 지났다. 중국어는 그냥 조금씩 하고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순차적으로 외국어를 가르쳐 나가기로 노선을 정했으므로, 일단 한국어를 꾸준히 늘려가고 영어에 살을 붙여가는 데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중국어는 영어가 안정되면 그 때 신경 쓰는 걸로. 그래도 이 때부터 동네 중국인 가게에 가서 사과 정도를 중국어로 사 올 수 있는 실력은 됐으므로, 이미 삼중 국어의 싹은 이 때부터 틔우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제 만 다섯 살부터는 언어의 뿌리도 키우고 흙도 단단하게 덮어주며 연두색 싹을 자라나게 하는 시기에 돌입한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정도로 걱정 없이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좋은 영어 선생님들께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 고마운 과정들이 없었더라면 어디서부터 아들을 가르쳐야 할 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영어의 첫 단추를 잘못 뀄더라면 타향에서 아들의 교육을 어떻게 할 지 몰라 쩔쩔 매면서 하루하루를 괴롭게 보냈을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은 한국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엄마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치원 상급반에 아이를 보냈거나, 초등학교 일 학년에 아이를 막 보낸 엄마들이 아마 비슷한 맘을 품을 텐데, 아이가 유치원 방과후 영어 교육을 통해 무사히 영어 공부에 안착한 경우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필수교육이 이래서 중요하고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이 시기에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Ep3은 저자가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던 "우리 아이 유치원 방과후 영어 교육이 선행 학습이었나"를 원고 전체 흐름에 맞게 다시 손 봐서 실었습니다. https://omn.kr/pbz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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