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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S ELECTRIC Sep 30. 2021

11년 전, 나의 퇴사를 잡은 단 한마디


11년 전, 사표를 썼다. 

당시 수배전반 영업팀에 있었는데 유별난 성격을 가진 고객을 대응하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영업사원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힘들면 그만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팀장님과 동료들은 왜 그러는 거냐고 만류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좀 쉬고 딴 길 찾아보겠습니다.” 

“한창 돈 벌어야 할 시기인데 뭐 먹고살려고…?”

“글쎄요.. 정 안되면 라면 먹고살겠습니다. “ 

“아…. 라면…” 


그렇게 사직 의사를 밝히고 업무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당시 후배들은 나를 라면 열사라고 불렀다. (라면 먹고살겠다는 말이 그렇게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라면에 대한 정의를 바꾼 전설의 명대사가 나온 영화 ‘봄날은 간다’    나도 LS일렉트릭에서 라면에 대한 어록(?)을 하나 남겼다


사실 퇴사를 결정했을 때 가장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귄 지 몇 달밖에 안 된 여자친구였다. 회사를 그만두면 내 사정을 말하고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백수 될 건데.. 나랑 같이 라면 먹고살래? “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리고 여자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며 퇴사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배전기술팀의 이 부장님께서 날 찾아오셨다.


“회사 그만두겠다고 했다면서?“ 

“네. 죄송합니다.“ 

“회사생활하다 보면 고비가 찾아온다. 그래도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하면 후회한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일할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기술적인 거 아무것도 모릅니다. 짐만 될 거 같아요.“ 

“처음부터 아는 사람 있냐? 내가 책임지고 가르쳐줄게… 나 한번 믿어봐.“ 


뜻밖의 제안에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고마웠다. 


헤어지고 나서도 나 한번 믿어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얼마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부장님은 즉시 내 팀장님을 찾아갔고 팀장님도 흔쾌히 나를 배려해주셔서 팀을 옮기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배전기술팀에서 이 부장님과 일을 하게 되었다. 


주요 업무는 전기설계회사, 엔지니어링 회사를 방문하여 도면작업, 시방서, 예산용 견적서 등을 기술지원하며 신규 PJT 정보를 얻고, 자사 제품을 SPEC-IN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회사가 신규 프로젝트의 수배전반을 수주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전기도면 보는 법, 견적하는 법, 시방서 작성 등을 배웠다.


쉽지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이 부장님의 전기적 지식은 정말 놀라웠다. 


수배전반, 전기계통 설계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적 제안 등의 능력이 대단하셨다.


설계사를 같이 방문해 기술 자문을 하면 고객은 이 부장님의 탁월한 지식과 기술적 제안에 놀라곤 했다. 물어보지도 않은 큰 프로젝트를 먼저 이야기하고 이 프로젝트 같이하자고, 좀 도와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아…이 사람은 진정 수배전반 기술의 마스터…달인이다.’ 


옆에서 보면서 참 많이 감탄했다.


하지만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하고 한 성격 하셔서 내가 실수하거나, 잘 모를 때는 아주 호되게 혼내셨다. 박살 나도록 깨지면서도 고마웠다. 나에 대해 기대가 없거나 포기했다면 혼내지도 않는다는 것을 사회생활하면서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부장님께 눈물 쏙 빠지게 혼나는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나도 조금씩 성장했던 것 같다. 내가 기술 지원하고 SPEC-IN 한 프로젝트를 영업팀에서 수주할 때 나의 성취감과 보람은 컸다. 영업사원에게 ‘형이 도와줘서 수주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참 기뻤다.


1년, 2년, 3년, 4년, 5년… 이렇게 꽤 오랫동안 이 부장님과 함께 일하다 TO문제와 상부조직의 결정에 따라 나는 견적팀으로 가게 되었다. 이 부장님은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내게 많이 미안해하셨다. 그렇게 나는 견적팀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게 되고 적응해 나갔다. 


견적팀으로 옮긴 지 거의 1년이 다 되고 새 업무도 꽤 익숙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이 부장님께서 찾아오셨다. 같이 커피 한잔하자고 하셨다.


“잘 지내냐?“ 

“예.. 부장님. 업무도 많이 적응하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구나…음…“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기술파트에 새 티오가 났다. 다시 같이 일할래?“ 

“아…그래요?…근데 저 그렇게 혼내시더니…저 말고 똑똑한 사람 뽑으시지 그러세요?“

“설계사 다녀보니까 너 찾는 사람들이 많더라. 참 잘 도와줬는데 아쉽다고 하면서 말이야…”

“부장님…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음을… 드디어 알게 되신 건가요?“ 

“험…험...뭐 그렇다고 하자…어떡할래?“ 


당시 견적팀의 업무도 나에게 잘 맞는 것 같아 계속 견적팀에 있고 싶다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이 부장님이 어떤 분인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회사를 그만두려 했을 때 손을 내민 분이다. 내가 어떻게 그 은혜를 잊고 나만 편하자고 할까? 그럴 순 없었다.


“부장님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이젠 저 좀 적당히 혼내시죠…그것만 약속하시면 갈게요.“ 

“그래…앞으로 혼내지 않을게…약속할게…“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이 부장님과 일하게 되었다. 견적파트장님껜 진심으로 미안했다. 믿고 받아주었을 텐데 1년 만에 기존팀으로 복귀하겠다고 하니 좀 어이없으셨을 것 같다. 친정팀으로 가겠다는데 고과를 잘 줄 사람은 없다. 그해 인사고과를 바닥으로 받는 걸 감수하면서 이 부장님께 돌아갔다.


이 부장님은 딱 한 달간만 약속을 지키셨다. 한 달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내가 실수하면 아주 그냥 박살을 내셨다. 그렇게 중간 1년을 빼고 9년간 같이 일하고 있다. 한 직장에서…그것도 수많은 팀이 있는 대기업에서 9년간 같이 일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부장님을 주축으로 하는 배전기술파트 업무가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이 부장님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금까지 일해왔다. 최근에는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기술 지원을 많이 하는데, 설계사와 고객 측에서 요구하는 기술적 사항이 갈수록 고난도의 업무라 갈수록 힘들고 바쁘다.


이 부장님과 나. 3년 전 회사 가을 야유회때 찍은 사진이다


언젠가 이 부장님과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부장님 저희 햇수로 10년째 같이 일하고 있네요. 정말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그래…인연인지…악연(?)인지는 모르겠다만 오랫동안 같이 일했지.“ 

“하하 그렇죠“ 


11년 전 내게 손을 내밀고 잡아주셨기에 나는 계속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고, 헤어지려고 했던 여자친구와는 계속 교제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세한, 김라한 내 생명보다 소중한 두 아들이 태어났다. 만약 그때 회사를 그만두었다면 지금의 내 가족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여름피서를 즐기고 있는 두 아들. 라한이는 좀 찡그리고 있고 세한이는 웃고 있다


앞으로도 배전기술파트에서 이 부장님과 계속 같이 일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안다. 회사 차원의 조직개편 등으로 언젠가는 같이 일하지 못하고 헤어질 날이 올 수도 있다. 그것이 조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천인데 성경을 통해서 사람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이 부장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존경한다.  


이 부장님과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온다면 큰절을 하고 그동안 나에게 베푼 은혜에 감사하며 영원히 잊지 않을 것 같다. 언제가 그날이 올 때까지는 지금처럼 감사하며 같이 즐겁게 일할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1년 전 내가 회사 그만두겠다고 징징 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나를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고, 그분이 바로 이 부장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부장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잡았다. 많이 부족한 나의 손을 잡고 긴 세월 동안 이끌어준 이 부장님께 감사하다.


아…오늘도 은혜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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