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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Sep 11. 2021

아침 출근길 당황하셨어요?

건망증이 나를 부끄럽게 해

아침은 항상 바쁘다. 좋아하는 커피도 내려 마시고 어젯밤 피곤해서 눈길도 못 준 강아지도 이뻐해 줘야 한다. 독서 모임에 글을 읽은 소감도 몇 글자 써야 한다. 좁은 집안이지만 집안도 한 바퀴 휘~ 돌아본다. 딸들이 알아서 정리하고 청소해 둔 집 안의 모양새가 나쁘진 않다. 심지어 남편은 딸들이 엄마보다 살림을 훨씬 잘한다고 칭찬이다. 내가 눈을 치켜뜨면 살짝 옆으로 와서 "그래야 애들이 잘해주지"라고 말한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전에 바쁠 게 당연하니까 빈 속으로 출근할 수도 없어 부랴부랴  어젯밤에 미리 준비해 놓은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정류장으로 뛰어 나간다.


집 앞에서 정류장까지는 5분 거리, 앱이 알려주는 버스 시간을 알기 때문에 거침없이 달려 나가 버스를 만난다. 익숙한 버스가 다가오고 나는 열리는 문으로 잽싸게 올라탄다. 새벽 5시 40분 버스에 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연스럽게 요금 단말기에 핸드폰을 가져다 댄다. " 삑, 감사합니다"라는 기계음 대신  정적이 흐른다. 소리가 안 난다. 당황한 나는 단말기를 쳐다 보고 다시 핸드폰을 가져다 댄다. 어라~ 이번에도 조용하다.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묘하다. 왜 저러시지? 나의 핸드폰을 쳐다본다. 아뿔싸. tv 리모컨이다. 사이즈가 내 핸드폰과  비슷해서 리모컨을 들고 나온 모양이다. 핸드폰 케이스 안에는 카드와 비상금이 모두 들어있다. 이 버스를 안 타면 나는 지각인데~ 가방을 뒤지니 만 원짜리 몇 장, 또 다른 비상금이 있다. 얼굴은 이미 달아 올라서 화끈화끈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 마스크에 가려졌기에 망정이지~ 손에서는 자꾸 진땀이 난다. 기사님은 거슬러 줄 동전을 쳐다보시더니 한숨을 쉬신다.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버스가 출발을 한다. 기사님을 쳐다보니  "오늘은 그냥 타세요." 하신다. "감사합니다. 내일 꼭 두배로 차비 낼게요." 덕분에 무사히 출근을 하고 ` 만나면 차비를 드려야지' 하면서 하루 종일 버스 번호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 친구가 리모컨을 뼈다귀와 보관하다가 푹푹 끓여 버렸다는 얘길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지갑 대신 마트에 리모컨을 들고나간 이야기도 번번이 들은 적이 있다.   매일 한 번씩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진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 건망증 때문에 실수를 한 이야기가 끝도 없다. 예순이 곧 다가오는 우리 나이는 그럴 수도 있어.라고 하는데 나는 화가 난다. 젊을 때는 기억력이 좋아서 온 집안 식구 생일은 물론 거의 백개 넘는 전화번호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력 좋기로 유명해서 기억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나를 찾던 사람들도 많았었다. 단순 기억력도 좋아서 학창 시절 20개 영단어 10분 받아쓰기 그런 거 하면 일등으로 통과하던 나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날 일도 기억이 잘 안 난다. 현장에서도 이거 잘못했으니 내일 출근하면 꼭 되새겨 줘야지, 하고 있다가 잊어 먹어 버린다. 이쪽에서 화가 잔뜩 났다가도 저쪽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누가 말을 시키면 금방 또 잊어 먹어 버린다. 좋은 점은 덕분에 화를 오래 갖고 있지 않는다. 특히 사람 사이의 말은 금방 잊어 먹어 버린다. 누군가 나에게 이거 절대 남에게 말하면 안 돼, 하고 비밀 얘기를 해주면 그 말을 한 사람까지 잊어 먹어 버린다.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하면 나는 까마득히 모르쇠 얼굴을 하고 쳐다본다. 정치권에서만 있는 모르쇠라는 단어를 나도 직접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아, 나는 치매일까 건망증일까 걱정이 되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검사를 해 본 적이 있다. 다행히 뭐 그리 심한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섬세해지고 정확해질 줄 알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서운하지 않게 잘 챙겨주고 보살펴 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항상 마음을 들여다 보고 해결책을 같이 고민해 주는 노후를 맞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싶다. 오늘 읽은 책도 필사를 하지 않으면 기억이 안 난다. 어떤 상황을 마주 하면 메모가 되어 있는지 먼저 찾는다. 누가 얘길 하면 카톡으로 보내줘 , 나는 말을 기억 못 해요.라고 얘길 한다. 열심히 말을 하는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듯해서 속으로 미안할 때도 많다.


덕분에 여러 개의 메모장이 내 곁에는 항상 있다. 책을 볼 때는 필사 공책이 있고 전화 통화를 할 때도 기록을 하면서 통화를 한다. 회의를 할 때는 가능한 한 모든 대화를 기록하려고 애를 쓴다. 어떤 날은 이런 걸 왜 기록을 하는지 자신에게 어이없어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여러 번 체험했기에 더더욱 메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점점 말보다는 기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소한 얘기를 걸어오는 사람 앞에서도 메모장을 꺼내 드는 습관을 가졌다. 상대가 불편해할게 뻔한데도 나는 나를 못 믿어서 손에서 메모를 포기하지 못한다.


아침에 민망했던 일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더 일찍 일어 나기로 했다. 서두르면 실수하게 되고 서두르면 당황하는 일을 만나게 다. 그리고는 메모장을 한 번씩 훑어보기로 한다. 메모장을 훑어보면서 나는 잠깐 여유로워질 수 있고 좀 더 느긋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버스비를 현금으로 넣어 가지고 다니고 있다. 차량 번호가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이러다 그 고마운 분의 얼굴도 잊어 먹게 생겼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꼭 만나지기를.

저 친구는 뭘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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