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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당근

마흔일곱 번째 월요일밤

by 오소영

덥다. 정말 너무너무 덥다. 작년에는 잘 때 에어컨을 몇 시간 있으면 꺼지게 설정해 두었는데, 올해엔 에어컨을 끌 수가 없다. 정말 다행인 건 원래의 비실비실한 에어컨이 고장 나 새 에어컨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온도로 맞추어도 예전 것보다 몇 배 더 시원하다.


오늘도 엄청나게 더웠다. 집밖으로 나가서 길을 걸으면 내가 잘 구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더운 날 당근 거래 약속이 잡혔다. 지난 주말부터 이사 가면서 처분해야 할 물건들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는데 일요일부터 문의가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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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물건은 만년필 12구 리얼가죽케이스. 만년필 취미에 한참 열올리고 있었을 때 이 케이스쯤은 가볍게 채우겠지 싶어서 알리에서 본 12구 케이스를 주문해 버렸다. 그런데 그걸 주문하면서 좀 더 싸고 간편하게 지퍼로 닫을 수 있는 케이스를 또 주문했고, 뒤에 주문한 케이스를 쓰면서 앞의 케이스는 집의 어딘가에서 잊혀졌다.. 그걸 이사 준비하면서 청소를 하다 찾았고 당근에 올렸는데 처음 가격에는 사람들이 관심만 찍더니 4천 원을 내리고 나서 바로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백발 머리의 차분한 아저씨가 계셨다. 꺼내서 확인해 보시라니까 손을 한번 휘저으시더니 쿨하게 바로 입금해 주시고 가셨다. 케이스가 아저씨의 소중한 만년필들을 잘 보호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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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물건은 예전에 팬분의 친구분(?)이 선물해 주신 직접 만든 협탁이었다. 굉장히 차분한 느낌의 채도가 낮은 그린색이 독특했고, 서랍이 있어 활용도가 좋았지만 좁은 내 집에서는 제대로 모습을 뽐낼 수가 없었다. 구석에 두고 온갖 물건들을 쌓아두는 받침대 역할을 했던 이 녀석은 어머님과 따님이 함께 오셔서 받아가셨다. 새 집에서 다른 물건에 가려지지 않고 예쁜 빛깔을 드러내며 잘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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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갑자기 연락이 와 당근 거래가 두 건 더 잡혔다. 라이언 넥 선풍기와 엘지 에어컨 예전모델 호환 리모컨이 팔렸다. 라이언 넥 선풍기는 채팅에서의 말투나 여러모로 봐서 여자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키가 크시고 빨간색 폴로티를 입으신 남자분이 오셨다. 물건을 받으시고 허브티 세잔(종이컵 세 개에 티백 세 개가 세팅되어 있었고, 얼음컵도 하나 들어있었다.)을 주시더니 기쁜 얼굴로 가셨다. 허브티 컵홀더에 쓰인 이름을 찾아보니 연신내에서 힐링카페를 하시는 듯했다. 자녀분께 주시는 걸까, 그분이 직접 쓰시는 걸까 조금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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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리모컨은 2천 원에 팔았는데 여자분이 굉장히 호탕하게 웃으시며 나타나셨고, 이걸 팔아줘서 너무 고맙다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가셨다. ㅎㅎ 라이언 넥 선풍기와 에어컨 리모컨 모두 너무 싼 가격에 올린 거라 그냥 내릴까 고민도 했지만, 필요로 하던 사람이 있고 버려지는 것보다는 쓰이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데 기본적으로 공포를 갖고 있는 나에게도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팔고 나눌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다. 물건들의 새로운 쓸모를 찾아주듯이 내 음악도 어딘가에서 새로운 분들께 쓸모 있는 것이 되면 좋겠다. 많이 힘들고 지치는 요즘이지만 그렇게 또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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