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를 사랑하는 공간디자이너의 첫 프로덕트 프로젝트
손편지를 좋아한다. 빠르지 않아서 좋다. 문장을 고르고, 말투를 다듬고,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적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젠가부터 키보드나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는 편리함에 아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부쩍 ‘다시, 느리게’라는 말을 곱씹곤 한다.
나는 수원에서 나의 취향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다. 빈티지 엽서를 모으고, 오래된 가구를 닦아 쓰며, 손편지를 쓰는 습관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행궁동의 성곽길을 걸을 때면 마음이 절로 느려진다. 수원의 사대문과 화성행궁에 깃든 정조대왕의 흔적은 늘 내게 말을 건네온다. 문득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느낀 감정을 인장처럼 꾹 눌러 남길 수는 없을까.
그렇게 ‘실링 왁스’가 떠올랐다.
나는 왜 이토록 느린 도구에 끌리는걸까?
실링 왁스라는 단어가 다소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보면 참 감성적인 도구다. 오래전에는 편지나 문서를 봉인할 때 사용되었다. 녹인 왁스를 종이에 떨어뜨리고, 도장을 꾹 눌러 찍는 과정. 그 순간 하나의 인장이 탄생한다. 단순한 도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징과 마음, 고유한 흔적이 담겨 있는 도구. 편리함이 지배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서의 실링 왁스는 오히려 작은 의식처럼 느껴진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전하고 싶은 마음. 진심이 담긴 일은 언제나 조금 불편하고, 다소 느리며, 그렇기에 오래 남는다고 나는 믿는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의 인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 질문 속에서 ‘디자이너로서 내가 만드는 첫 인장’이라는 답을 찾았다. 수원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경험하고 느낀 감정을 담아낸 인장. 빈티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아날로그 감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꺼내 쓸 수 있는 인장. 그런 상상을 하며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예쁜 도장을 만드는 데 그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수 있는 물건, 작지만 진심을 품은 물건을 만들고 싶었다. 누구보다 나다운 속도로.
그렇게, 이 실링 왁스 프로젝트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손편지처럼 느리지만 진심 어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누군가의 편지 위에, 혹은 소중한 기록 위에, 이 인장이 조용히 얹히기를 바란다. 내가 만든 인장이 당신의 이야기에도 다정하게 찍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