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집 식탁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탁, 소리가 나더니 거실 천장의 전구가 하나 나갔다. 약간의 연기도 올라오고 있어서 괜찮은건가 지켜봤더니 나가면서 잠깐 나는 연기였다. 하- 언젠가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올 것이 왔구나. 전구를 갈아끼워야 해..
이 집에 들어올 때 전구 갈아끼울 때는 색깔 맞춰로 하나만 튀게 하지 말고, 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이 집의 전구를 가는 일은 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 해야지. 이거 안하고 불편하게 산다고 이사나갈 때 그냥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원상태로 해놓고 가야하는데, 공부할 나를 위해 밝은 빛을 얼른 주자, 당장 내일 갈자, 생각하고 어젯밤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자, 전구를 사야하는데 체크해보자. 나는 같은 전구를 사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이 전구를 내가 갈 수 있는지, 그러니까 내 손이 닿는지, 식탁 의자를 아래에 가져다두고 그 위에 올라가 팔을 뻗어보았다. 어림도 없었다. 까치발을 들면 닿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그냥 한참 멀었다. 이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일단 내 집 안에서는 해결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일단 학교에 갔다. 그리고 아홉시를 좀 넘겨 중개인에게 연락했다(여기서는 절대 집주인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 무조건 중개인에게 연락한다). 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서 이 전구가 나가서 갈아야 하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1. 이거 마트에 가면 살 수 있니?
2. 내 키가 작아서 의자를 사용해도 손이 닿지 않는데 혹시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니?
사실 누군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나 혼자 사는 집에 누가 와서 이걸..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답을 기다렸는데, 잠시후 중개인에게서 답이 왔다.
-응 그건 니가 슈퍼마켓이나 하드웨어 샵에 가면 살 수 있을거야. 그리고 너는 지하1층의 관리 사무실에 가서 사다리를 빌릴 수 있는지 시도해볼 수 있어.
그래서 고맙다고하고 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숙제도 많고 할 것도 많아서 머릿속에서 오늘 하교하면 뭘 언제 어떻게 할지 순서를 정하다가 아차차, 전구 교체 까먹을 뻔 했네, 전구교체가 우선이다, 하굣길에 전구 사서 바로 갈아끼우자!고 계획을 세웠더랬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집 근처의 큰 마트에 가서 일단 직원에게 이런거 있냐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더니 여기는 없는데 저쪽의 가게 가면 홈데코 용품 파니까 가봐, 하면서 직접 마트 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고맙다고하고 그 가게로 갔다.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있니 물어보니, 아 미안해 우리 다른건 있는데 이건 없어, 했다. 얼라리여, 이것 좀 보게.. 어쩌지?
나는 챗지피티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이거 어디서 사냐고 물었는데 같은게 아닌 다른걸 알려주더라. 안되겠다, 차분히 집에 가서 피씨로 찾아보자. 일단 밥을 먹자. 밥을 먹고 찾으러 돌아다니자. 일단 발품 팔아 돌아다녀보고 그 후에 온라인 알아보고 그러고도 안되면 중개인을 통해 집주인에게 온라인 구매처라도 알려달라고 하자,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양치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일단 무작정 나가보는거야, 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아파트 보안 일을 하는 분이 계셨다. 나는 그분께 가서 나 니 도움이 필요해, 하고 사진을 보여주며, 이걸 사고 싶은데 어디 가면 살 수 있을까? 페어프라이스 가봤더니 없다고 했어. 그러자 그는 거기 말고 저쪽의 페어프라이스 뒷편에서 이거 살 수 있을거야, 거기 가게 있어, 해서 고맙다고 하고 그쪽으로 갔다. 다른쪽의 페어프라이스 가서 정확히 어느 가게인지는 모르겠지만 닥치는대로 들어가보자, 하고는 가전용품 기타등등 파는 가게에 들어가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있냐 물었다. 그랬더니 있다면서 어느 색을 원하냐고 묻는게 아닌가. 오! 있다! 나는 흰색으로 달라고 하고서는 값을 치르고 나왔다. 자, 이제는 사다리다!
그렇게 집으로 가서는 곧장 관리사무실로 갔다. 나 1213호에서 왔는데, 혹시 사다리를 빌릴 수 있니? 나 천장에 등 갈아야 해, 라고. 그러자 관리사무실의 여직원은 우리는 저걸 가지고 있는데, 하면서 사다리를 하나 가리켰다. 그런데 그건 매우 짧아 보였다. 직원은 덧붙이기를, '이건 그런데 우리가 쓰는건데 안정적이지 못해서 네가 사용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 게다가 짧고.' 내가 봐도 이건 너무 짧아 보였다. '너 이거 말고 다른건 없니?' 물으니 직원은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저어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면서,
"너 사다리가 필요하다고? 왜 필요해?"
묻는거다. 아이코. 다른 직원이 또 있는지 몰랐네. 그는 약간 직급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는데, 나는 그에게 '천장 등을 갈아야 해'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너가 직접 갈려고?' 물었고, 나는 '아마도. 나는 혼자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잠시후 그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다리를 가지고 왔다. 아마도 여직원은 이것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사무실이 아니라 어디 다른데에 보관중인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너 어디 산다고 했지? 그래서 1213호야, 했더니 '내가 들어다줄게, 가자' 했다. 오 그래 고마워, 하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12층까지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오늘은 제법 흐려서 해가 없는데도 나는 땀을 흘렸다. 너무 습해서 그랬다. 나는 그 직원에게 '싱가폴은 너무 습해'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맞아, 여긴 섬이라서 그래. 습도가 늘 70~80퍼센트는 돼. 에어컨 없으면 우리는 죽어.'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내가 말했다. I think so. ㅋㅋㅋㅋㅋㅋㅋ
계속 올라가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흐음, 갈아준다고 하면... 그냥 고맙다고 받을까?' 생각하다가, '그렇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인데 .. 좀 그렇잖아?' 했다. 사실 전구 가는게 뭐 어려운거라고, 남들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냐 싶어서 하려고 했었지만, 내심 누군가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거든. 그렇지만 내가 혼자 산다는 것 때문에 역시 꺼려지기는 했다. 집 문을 열고나니 그는 내게 사다리를 건네면서 들어오려 하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그에게 '네가 좀 해줄 수 있니?' 물었다면 해줬을 것 같긴 하지만, 그도 내가 혼자 살아서 주저하는 것 같았고, 나 역시도 그를 들이기가 좀 저어됐다. 그래서 사다리 고맙다고 했는데, 그는 내게 관리사무실 전화번호 아냐며, 사용 다 한 후에 전화하고 복도에 세워두면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든가 아니면 내가 갖다줄게' 했다. '네가 직접 갖다준다고?' 해서 응, 갖다줄게 했더니 고맙다고, 그런데 복도에 세워두고 전화해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그를 보냈다. 자, 가자!! 해보는거야!
나는 사다리를 펼쳤다. 그리고 조심스레 올라갔다.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조금 쫄렸지만, 자, 이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 천장 등을 살살 돌려가며 빼냈다. 빼기에 성! 공! 나는 망가진 전구를 들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식탁 위에 두고 새로운 전구를 가지고 조심스레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빼낸 것과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끼워냈다. 자, 잘 끼워졌지? 다시 사다리에서 내려와 불을 켜보았다. 불이 잘 들어왔다. 와- 전구를 갈았다, 만세!!
완전 성취감 장난 아냐. 하루종일 앓던 이 같았는데 빠졌다! 나는 포부도 당당하게 사다리를 들고 엘레비에터를 탔다. 뭐야, 들어다준다기에 겁나 무거운건줄 알았는데 별 거 아니잖아? 껄껄. 그리고 관리사무실로 가서는 '나 끝났어!' 하고 사다리를 내려두었다. 여직원은 벌떡 일어나서 너 했어?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남직원은 너 벌써 다 했어? 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I am very proud of myself.
그러자 두 직원 모두 깔깔대고 웃으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졸라 자랑스럽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컸어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