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월요일에는 GOP 가 있었다.
GOP 는 Group Oral Presentation , 그룹 발표이다.
조를 이루어서 주제를 정하고 피피티용 슬라이드르르 만들고 모든 멤버가 고르게 4분정도의 시간 동안 발표를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슬라이드는 통일되어야 했으며 각자 다섯장 이상의 슬라이드를 만들어야 했다. 우리 그룹은 이걸 위해 한차례 만나 슬라이드를 어떻게 할지 정하고 각자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진작에 얘기해두었더랬다.
4분간 해야할 발표가 문제였는데, 선생님은 진작부터 '너네가 모든걸 외울 필요는 없다, 내가 큐카드를 줄테니 거기에 적어서 그걸 보면서 하면 된다, 그러나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는건 잊지 말아야 한다' 고 했더랬다. 그래, 큐카드를 주니 별 걱정 없겠네, 진작에 각자의 대본을 써두었던 우리들은 사실 그다지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그룹발표 2주정도 남겨두고 선생님이 준 큐카드를 받아본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큐카드를 각자에게 딱 한 장씩 주고, 그게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T 도 당황해서, 우리는 서로 얘기했다. 이거 그냥 외워야겠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틈나는대로 외우자고 마음먹었다. 외워야지, 하고 마음을 먹으면 따로 시간을 내야하니, 등하교 시간을 이용하자 싶어 그 때 수시로 외우기를 시도하고, 한 번은 녹음해서 달리기해서 듣기도 했다. 녹음해서 듣기는 해보기 전까지 세상 천재적인 방법인줄 알았는데, 해보고나니 딱히 그런건 아니어서 달리기 하는 그 날 하루 딱 시도해보고 다시는 하지 않았다. 오십프로쯤 암기했다고 생각했을 때, 큐카드에 완전히 외우지 못한 부분의 첫문장들을 적어두었다. 첫문장을 보면 그 뒤는 생각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내가 준비한 큐카드는 이랬다.
보라색이 처음 적은거고, 외워도 외워도 잘 안돼서 추가로 안외워지는 문장은 빨간색 볼펜으로 적어두었다.
지난 주말에 친구가 왔다 갈거라 주말을 모조리 이용할 순 없었는데,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낮시간이라 오후는 외우는데 쓸 수 있었다. 나는 친구를 배웅하고 공항에서 돌아와 부지런히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요일 밤에 늦게 잤는데, 이 때만 해도 90프로 이상 외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발표 당일, 첫번째 그룹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큐카드에 빼곡하게 적어 그걸 읽어내려가느라 관객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떤 학생들은 심지어 핸드폰을 보고 읽기도 했다. 그렇게 첫그룹, 두번째 그룹이 끝내는 걸 보면서, '이걸 완전히 외워온 사람은 없나보구나' 싶었다. 우리 조의 성실한 학생 T 는 모두 외웠다고 했다. 그는 숫제 큐카드를 빈 채로 그냥 들고 왔다. 그러더니 좀 불안하다며 갑자기 큐카드에 문장들을 적기 시작했다. 나는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가 한 번 다시 기억해보았다. 그렇게 두어번 반복하고 나니, 내가 백프로 외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 나 또 세상 천재 되는 것인가. 이걸 모조리 외워서 웃는 얼굴로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발표하는 사람, 이 클라스에 내가 유일한가..독보적인가...
그렇게 모두가 읽어내려가다가 일곱번째로 우리 그룹이 앞으로 나갔다. 나는 큐카드를 들고 갔지만, 그건 그저 거들뿐, 자신이 있었다. 백프로 외운 이 중년학생의 저력을 보여주마. 아 연륜과 경력이란 저런 것이구나, 모두 알게 해주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나 웬걸, 발표를 시작하자마자 목소리가 떨려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이 된 나는 관객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거 딱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긴장했고, 앞에 앉아있던 다른 그룹의 여학생 한명이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심호흡하라고 내게 제스쳐를 취해주었다. 그 학생을 보고 심호흡을 크게 해보기도 했지만, 나는 계속 떨렸고, 중간중간 문장이 꼬였으며, 마지막에 다음 학생이 발표할 거라는 문장은, 아주 짧았는데도 세 번이나 버벅거리면서 마칠 수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내가 제대로 해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내가 내 대본에 있는걸 다 말하긴 한건가? 독보적이고 유일한 능력자일 거라고 생각한 나는, 그냥 평범한 다른 학생이었다. 내 다음으로 한 우리 그룹의 A 야말로 다 외웠고 떨리지 않은채로 아무것도 보지 않은채-큐카드를 들고 나오지도 않았다- 발표했지만, 그건 대단했지만, 그녀 역시 관객들을 쳐다보진 않았다. 세번째 발표자는 T 였는데, 다 외웠다고 한 그였지만 역시 긴장했는지 자꾸만 뒤늦게 준비한 큐카드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발표자는 처음부터 그냥 큐카드를 보고 읽었다.
와, 이거 생각보다 더 긴장되네, 도대체 왜이렇게 긴장한거지..
우리 다음으로 한 그룹에서는 첫번째 발표자가 다 외워서 발표했다. 큐카드를 들고 나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난 중간고사에서 나와 3점 차이로 2등을 한 학생이었다. 저 학생, 정말 대단하구나..
발표를 마치고 학생들의 질문,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고나서 자리로 돌아왓다. 마쳤다는 생각에 행복해졌다. 화요일인 오늘은 mock test 가 있는 날이었다. 어제 발표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공부를 좀 하고 자려고 했는데, 어제 발표를 마치고 오후 무렵부터 급격하게 잠이 쏟아졌다. 일요일에 잠을 못자기도 했고 긴장이 풀린 탓도 있을 것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가면서, 아 일단 집에 가자마자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공부하자,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일단 샤워를 한 다음에 침대에 가 뻗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밤 열시반이었다. 아니, 도대체 몇 시간을 잔거야. 세시간 이상을 자버렸네. 그런데 밤 열시반..에 일어나서 밥 먹기는 좀 뭣하잖아? 만약 지금 일어나서 밥 먹고 공부하면 잠을 또 언제 잔담? 다행히도 오늘은 오후 한시반에 테스트가 있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금요일과 토요일, 한국에서 온 친구랑 신나게 돌아다니고 먹고 마시고 일요일에 그룹발표 용 대본을 열심히 외우고 늦게 자고 그리고 월요일에 발표를 마치고 집에 오니 완전히 풀어져버린 것 같다.
하- 내가 선택한 공부, 내가 선택한 일정.. 힘들게 어떻게든 해내고 있다.
수시로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공부 총량의 법칙이 있는거라고. 학교 때 성실하게 공부하지 않아서, 그걸 지금 다 몰아서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대학때 학사경고 받고 다녔는데, 지금은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 되어 졸지도 않고 수업 듣고 있다. 하여간 빡센 어학연수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