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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간

내 일정이 아닌 자연이 허락할 때

by 소휘

흙과 단절되면 비도 햇빛도 바람도 맑은 날도 흐린 날도 그다지 간절하지 않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대체로 비슷하다. 그런데 흙과 가까이 뭔가 가꾸는 순간, 비도 햇빛도 간절하면서 한편으로 무서웠다. 비가 오면 순식간에 진창이 되고 해가 나면 순식간에 잡초가 나고, 자연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내가 자연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약간은 생경한 경험이기도 하다.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고, 실내에서 보통 시간을 보내는 나는, 자연의 날씨에 맞춰 일정을 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농사는 철저히 자연에 맞춰야 한다. 기온이 올라가면 씨를 뿌리고, 해 시간에 맞추어 일을 해야 하고, 비가 오면 밭에 갈 수 없다.


씨앗을 뿌리고 나서, 나는 잘 들여다보지 않던 일기예보를 매일매일 확인했다. 주된 관심사는 비였다. 이번 주에 비가 오나? 몇 시에 비가 오지? 주말에 양일 다 비가 오나? 비가 얼마나 오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비가 오면, 내가 물을 안 줘도 작물이 잘 자랐다. 비가 오면 밭에 갈 수 없어서, 주말 양일 중 비가 오지 않는 날 밭에 가야 했다. 비가 오후에 온다고 하면, 오전에 밭에 가야 하니 서둘러야 했다.


올 봄에는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은 비가 와 준 덕에, 물 주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 덕에 일주일에 한 번만 갔는데도 작물이 좀 자란 것 같다. 비에 대한 내 태도도 바뀌었다. 주말에 비가 온다고 하면 사람들은 ‘주말인데 비가 오네!’하면서 짜증을 냈지만,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기분이 좋았다. 감자가 싹이 나겠지, 상추가 자라겠지! 하는 생각부터 났다.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비가 오고 나면 작물이 잘 자랐다. 빗물은 사람이 수돗물을 날라 물 주는 것과는 달랐다. 더 많은 양이 더 골고루, 더 길게 뿌려지기에 흙이 촉촉해진다. 흙이 촉촉하면 옮겨 심기도 수월했다.


여름이 되자 일몰 시간도 확인했다. 칼퇴하고 열심히 가면 7시 조금 넘어 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해가 지기 전까지 밭일을 조금 할 수 있다. 해가 지면 밭일을 못 하니, 길면 3,40분이 나에게 주어진다. 저녁에 밭에 가면 퇴근하고 오신 분들이 꽤 있다. 차 밑에 놓여 있는 구두를 보며, 나랑 비슷한 분이 역시 또 계시구나 생각했다.


길지 않은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해가 지고 밭에서 나와서 집에 도착하면 열 시. 거둬온 상추를 씻고 봉지봉지 정리하면 한참 늦은 밤에야 쉴 수 있었다. 평소에는 전깃불 아래에서 생활하니, 낮이건 밤이건 일하는 데 별 상관이 없었는데, 농사는 철저히 자연의 시간에 맞추어야 했다. 내가 시간이 있을 때 밭에 가는 게 아니라, 심어야 할 때에 심어야 했고, 해가 지기 전에 일해야 했고, 너무 덥지 않은 시간에 물을 주어야 했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 밭에 갈 수 있었다. 모든 게 자연이 허락할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의 때는 내 일정과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그러니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속담이 이해가 된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 자연의 때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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