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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나만의 무대를 위한 리허설

문을 닫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_ 프롤로그

by 김원빈

나는 일찍이 전공을 정한 편이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른들이 많지만 나는 이 숙제를 남들보다 빠르게 해결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밀도 있게 사용할 수 있었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10대에 조리 특성화고를 입학했다. 호기심도 많았고 싫증도 빠른 나는 막상 학교에서 부딪힌 것들이 생각과 달라 빠르게 포기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조리라는 일련의 과정이 다소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재주도 탁월해야 했으며 진득한 성격의 친구들이 요리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내가 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메타인지와 빠른 포기와 결정은 나를 다른 길로 안내했다. 돌이켜보니 빠르게 결정하는 건 타고난 재능 같기도 하다. 일단 부딪혀보자는 낙천적 성격은 사실 사업적인 역량에서 꽤나 좋은 에너지로 작용하니 말이다.


벼락치기 수능 준비로 턱걸이 입학한 경희대학고 식품영양학과는 음식에 대한 또 다른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선택이었다. 음식이라는 게 참 재밌다.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요리를 통해 바라보면 끝없는 미식과 예술적 향연이 펼쳐지고 영양학적으로 바라보니 그동안 몰랐던 그 이면의 것들이 수면 위로 느껴졌다. 내가 접한 두 분야는 확실히 전혀 다른 장르였다. 여기에 복수전공으로 공부한 외식경영학은 F&B산업을 평생 업으로 해야겠다는 결정에 쐐기를 박았다. 명확히 규정하긴 어렵지만 대학시절에도 특정 대상을 이리저리 뒤집고 꼬아 보는 관점 장착의 호기심을 꽤나 즐겨왔던 것 같다. 이렇게 음식이라는 카테고리를 다양하게 접근해 보는 연습에 매진했던 20대 그 자체는 내가 공부하는 학문, 그리고 취미 아울러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일치했던 시간이었다. 심지어 군생활도 특기번호 2131 조리병으로 근무했으니 말 다했다. 버릴 것 없는 20대 경헙의 자양분은 지금도 내가 모를 온 몸 구석구석에 저장되어 있다.


스물두 살, 외식경영 전문 잡지의 막내 에디터로 첫 발을 들였다. 남들보다 기록의 습관을 기질적으로 즐긴 덕분에 개인의 공간이었던 블로그가 잡지사 대표님의 눈에 운명처럼 띄었다. 20대 초반에 얻게 된 에디터라는 타이틀은 얼마나 스스로를 들뜨게 했는지 모른다. 패기 넘치는 20대 초반의 에너지와 어우러져 마치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은 것 마냥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시절이다. 잡지사에서 내가 배운 일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업의 다양한 이슈를 취재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일방적 주입식 소통이긴 했지만 대표님과 함께했던 아침 회의는 지금 돌아보면 매일이 값진 수업이었다. 이런 걸 체득이라고 하는 걸까. 작정하고 하는 공부보다 서서히 그때 회의를 통해 스며든 학습이 지금까지도 일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 중 무엇이 나를 변화시켰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을 때 떠오르는 명확한 답이 있다. 잡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성공한 대표님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스스로의 노력과 시간으로 성공에 가까워진 그들의 에너지의 확장성은 어마어마하다. 막 꿈틀대기 시작한 나의 나뭇가지에 엄청난 자양분을 그것도 무료로 나눠 받은 셈이다. 이 역시 그때는 몰랐고 지금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가 성장하고 있는 줄 모르고 즐거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첫 사회생활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남들에 비해 조금 특별해 보이는 일관된 경험은 잡지사 퇴사 후에도 자연스럽게 업으로 인도했다. 식당의 이름을 짓고 메뉴판을 짜고 콘텐츠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일. 사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직업인지도 모른 채 여기저기서 일을 주시는 바람에 그저 열심히 했다. 재밌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벌리 다니 열정을 갈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 바닥에 가성비가 좋은 인물로 입소문을 탔고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능력 좋은 프리랜서 시절의 20대 중반을 지냈다. 벌이가 괜찮아지니까 휴학 중이었던 학교로의 회귀가 의미 없게 느껴졌다. 비록 작은 성공이었지만 옛 어른들이 왜 젊었을 때 돈을 버는 게 저주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일찍 커리어를 시작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고 소위 말해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인정받는 경험은 확실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러고 싶지만 쉽게 그럴 수 없다는 걸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알게 됐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감사하며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업계의 관찰자에서 직접 무대에 서는 사람이 되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장사를 시작한다. 나 역시 그랬다. 설렘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였으며 직접 장사에 부딪혀보니 생각과 다른 점 투성이었다. 손님이 많아도 남는 게 없었고 좋은 브랜드도 운영자의 태도 하나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일종의 성과 중독 같았다. 에디터 시절부터 창업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크고 작은 성공들로만 채워졌기 때문이다. 성공은 분명 달콤한 존재다. 하지만 성공 에너지와 특유 격양된 도파민에 익숙해질 경우 판단이 흐려진다는 걸 깨달았다. 잘되는 가게의 노하우, 유명 프랜차이즈 대표의 인터뷰, 화려한 급성장 그래프... 업계 선배들의 성공담을 쫒았던 그때의 나에게, 왜 실패 이야기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첫 창업의 서툼과 인간관계의 배신과 절망. 팬데믹으로 인한 사업 실패 그리고 스타트업 초기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난관들. 나의 30대는 다양한 실패들로만 보기 좋게 채워졌다. 수 없이 많은 가게를 자의로 또 타의로 닫게 되면서 그 순간 깨달았다. 간판 불을 끄고 마지막으로 매장을 나서던 그날 느꼈던 무력감과 정체 모를 해방감. 문을 닫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그 상흔 속에서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브랜드 그리고 사업의 본질이 선명해졌다. 남들이 보기엔 실패일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앞으로 리허설이라 부르기로 했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내가 겪은 수많은 시작과 마무리 그 안에서 느낀 감정과 해석을 기록할 예정이다. 실패를 숨기지 않으려 한다. 내 경험을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이 자산이 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언젠가 분명히 크고 작은 실패를 마주할 것이다. 그때 나의 리허설 기록들이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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