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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18. 2024

그게 무엇이든 나로부터일 수 있도록

비단 여성만의 그리고 모든 여성들의 일은 아니겠으나, 많은 여성들의 경우 다이어트란 단어와 무관한 삶을 살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자의와 타의 영역, 그 둘이 뒤섞여 경계를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삶 전반이 다이어트와 무관하지 않고, 무관하지 못하게 살아왔다. 사회운동을 하고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지금이라고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이기도 하고.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처럼 극단적인 단식원과 같은 경험은 없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너무 현실과 동 떨어진 이야기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몸, 그리고 외모, 다이어트, 살 등의 단어들은 너무 밀착하게 들러붙어 서로가 각각의 단어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살을 뺀다. 너무 많이 먹어서 너무 살이 쪄서 건강에 좋지 않아서 임신 등 특정 목적에 부합하려고 보여 지는 직업군이라서 남자친구가 원해서 엄마가 하도 잔소리해서 게을러보여서 나만 너무 커서 작아지고 싶어서 드러나고 싶어서 반대로 숨고 싶어서 만만해지기 싫어서 무례함 속에 놓이기 싫어서 자원을 만들려고 그냥 싫어서... 쓴 만큼이나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 그렇겠지 그러나 하나의 모양만이 남는다. 살을 빼고 싶다는 것. 나도 그랬다. 지정성별 여성으로 지정성별 남성에게 사랑받기 더 ’용이‘하다 판단한 것 중 큰 지점은 ’몸’이란 요소가 있었고, 원가족의 엄마에게서도 가장 많이 그놈의 몸에 대해 끊임없이 소리들을 들어야 했으니까. 00 한의원에 한약이 식욕을 줄여준다며 지금도 큰 금액이 십 수년 전 결제하며 쓰디쓴 한약을 먹었고, 하루 단식으로도 배가 고파 야식을 먹으며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아니, 애초에 왜 싸워야 하지? 우리는 왜 모르겠는 싸움을 해.

나에게 있어 나에게 향한 여성혐오와 내가 가진 타 여성에 대한 여성혐오를 절절히 깨닫고 고통스럽게 직면했을 때에도 그 가능엔 ‘몸’이 있었다. 나는 왜 나의 몸을 좋아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도 얕보거나 싫어했을까. 그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나의 좋지 못한 천성인가. “나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아”라던 생각에 설득되지 않던 허점과 균열이 일어나 나는 다시 바로 서고 바라보게 되었다. 나인 여성과 여성인 당신을. 나의 커다란 몸은 커다란 몸으로만 그칠 수 없는 혐오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망할 가부장제 이성애 규범의 외모지상주의 다이어트 만만세 세상이다. 소설 속 ‘재미‘를 쫓는 피디를 경멸하며 ‘썅놈’이라고 혼잣말이 절로 나왔던 건 내 삶 주변에도 수없이 존재했고, 존재했을 무례한 놈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살을 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말라서 고민이기도 하고 뚱뚱하진 않지만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 다른 자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 아니 그 시작들 전에는 많은 경우 늘 똑같은 전제가 굴러들어가 있다. 살을 빼야 하는 것. 그러니까 비만이 아니고 뚱뚱하지도 퉁퉁하지도 통통하지도 않는 것.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정상 범주에서도 더 벗어난 몸이 되어야 그제야 ‘정상’을 붙여주고 예쁘다고 말을 건넬 거니까.

나 역시도 살을 빼야 한다. 다이어트가 필요한 몸이다. 건강하지 않은 몸을 조금 덜 느리게 안 건강해질 수 있도록. 그렇다 이미 건강하지 않은 몸을 건강하게, 라는 건 조금 이상한 말일 테니 점점 건강하지 않아질 몸이 더 천천히 흐를 수 있게 말이다. 물론 이렇게 쓰다보면 질문이 또 생긴다. 건강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나는 아마 현대의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수치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수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 약도 먹고 저 약도 먹으며 만성질환이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살아갈 테고, 그 질환들을 잘 관리해나가기 위해서는 체중 조절도 필수인 것일 거다. 그러니까 나의 건강에 대한 기준은 나의 몸의 느낌과는 어쩌면 또다시 무관해져 의료기관의 기준에서부터 시작되고 끝이 날지도 모른다. 물론 나 역시 몸이 상쾌함이나 불쾌함에 대해 인식을 하니까 그런 기준으로 나의 건강을 가늠해보기는 한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이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 더 자각하고 느끼며 파악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은 이 빨리빨리의 세계에선 좀처럼 선호되지 않는 방식이라 취하지 못한 채 일률적인 방식을 정답처럼 갖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몸 역시 그렇게 단일한 몸의 구성을 가져야 한다고 여겨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범주에서 비껴났다고 판정되는 몸들. 그 몸들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무례해지는 말들. 그 말들이 문제없다고 여겨지는 이 사회의 단일한 가치에서 풀숲을 헤집듯 따갑고 쓰라리더라도 벗어나고 싶다. 아니 넘어서고 싶다, 필요없는 지배와 같은 것들로부터. 아프고 기쁘고 슬프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들이 모르는 익명의 눈초리와 무례한 목소리들 때문이 아니라 나로부터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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