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권으로 사서의 자질까지 의심받았던 그날의 기억
도서관 사서로 이제 막 근무를 시작했을 때 일이다.
당시 나는 계약직 사서였다. 내 사수는 나를 살뜰히도 챙겨주었다. 덕분에 근무하면서 도서관 이용자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여러 참여했었다. 직접 경험해 봐야 나중에 프로그램 기획도 잘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내가 들은 강좌 중 '아이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부모 학교'가 가장 좋았다. 강사님은 좋은 그림책을 선정하는 방법부터 읽어주는 방법,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수업 시간에 강사님이 읽어주는 그림책들은 죄다 재밌었다. 주 독자가 아이들이다 보니 그림책 문장은 쉽고 간결하다. 복잡하지 않으니, 귀에 쏙쏙 들린다. 그리고 어떤 그림책들은 마지막에 내 머리를 한 대 후려쳐 띵하게 만들기도 했다.
강좌가 끝날 때마다 유아실에 가서 그림책을 참 많이 읽었다. 그러다 외국 저자가 쓴 ‘사랑해 너무나 너무나’ 그림책을 읽게 됐다. 이 그림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에 사는 수컷 펭귄 '로이'와 '실로'는 암컷 펭귄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서로한테만 관심이 있다. 같이 걷고, 같이 노래하고, 같이 헤엄치고, 같이 집을 만든다. 이를 지켜본 사육사는 두 펭귄이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사육사는 두 펭귄이 만든 둥지에 다른 펭귄이 낳은 알을 하나 가져다 둔다. '로이'와 '실로'는 그 알을 정성껏 품는다. 얼마 후 아기 펭귄 '탱고'가 태어난다. 동물원에서 아빠가 둘인 펭귄은 '탱고'가 최초다. 그렇게 가족이 된 세 펭귄은 ‘다른 펭귄 가족들처럼, 동물원에 사는 다른 동물 가족들처럼, 큰 도시에 사는 모든 가족들처럼’ 서로 사랑하며 산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그림책을 읽고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먼저 동물도 동성애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인간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다음은 이런 주제도 그림책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이들이 이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아이가 '어떤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거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올바른 답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나?
나는 이 그림책을 마지막 수업에 가져갔다. 그날은 수강생들이 각자 그림책을 한 권씩 가져와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배운 것을 뽐내는 날이다. 20명 좀 안 되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가져온 그림책을 읽었다. 어느덧 내 차례가 와서 사람들에게 ‘사랑해 너무나 너무나’를 소개했다.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해서 읽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내 낭독이 끝나고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고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동물도 동성애를 한다니 신기하다'
'세상에 이런 그림책도 있다니 놀랍다'
그 강좌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대부분 아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그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인 여성분이 입을 뗐다. 그분은 수업 첫날, 자기소개할 때 정년퇴직을 하고 남은 여생을 호스피스로 살고 싶어 준비 중이라 했다. 이 강좌도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배우러 오신 거였다. 나는 그분의 소개를 듣고 '퇴직하면 쉬고 싶을 텐데 저런 생각을 하다니 참 이타적인 분'이라 생각했다. 그분은 ‘이런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 순간 그곳의 훈훈했던 공기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사서가 그런 책을 아이들 추천도서로 들고 왔다니 자질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그분보다 족히 30살은 어렸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진행을 맡은 강사님은 이내 다른 사람에게 바통을 넘겼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나머지 참여자들의 낭독이 이어졌다. 그 이후부터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 그림책 선정이 잘못됐나'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그곳을 부리나케 도망쳐 나왔다. 설명하기 힘든 수치심과 무력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동성애를 인지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놀이터를 지나가려다, 여고생 두 명이 미끄럼틀에서 뽀뽀하는 장면을 봤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내 심장이 터질 듯 날뛰었다. 가끔 고등학교 친구들이 다른 고등학교 언니들을 가리키며 '저 언니랑 저 언니 사귄대'라고 했던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장면을 보기 전까지 나는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 이후로 동성애를 더 깊게 생각해 보거나, 동성애 현장(?)을 목격한 일은 없었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면서 자연스레 잊어버렸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직장에서 레즈비언 동료를 만나게 됐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애인’이라 칭했다. 보통은 '남자친구', '남친'이라고 하는데 '애인'이라고 하는 게 낯설었다. 그저 그녀의 말버릇 같은 거라고 여겼다.
그 동료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다. 그 소식은 내가 처음 놀이터에서 뽀뽀하던 여학생 둘을 봤던 때보다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아.. 정말 동성애가 있구나’ 정도였다. 그 후 레즈비언으로 사는 그녀의 수고로움과 어려움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성애자처럼 연인과 찍은 사진을 카톡 프로필로 할 수도 없었고, 다른 동료들처럼 남친과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늦은 새벽에 회식이 끝나면 그녀의 애인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동성애자의 사랑싸움은 이성애자의 사랑싸움과 조금은 결이 다를까? 그녀는 애인과 싸우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짐만 할 뿐이었다.
'혹시 그녀가 커밍아웃을 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야지'
내가 목격(?)한 두 번의 동성애 덕분에 나는 올바른 동성애 신념을 갖게 됐다. (엄마의 일방적 선택이지만) 나는 모태신앙으로 남녀가 사랑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며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들의 모습이 불쾌하거나 거북스럽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내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 그저 나와 똑같은 여고생이, 나와 똑같은 여자 동료가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었다.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그들을 구태여 구분 지어 애써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크게 들지 않는다. 다만 '동성애는 죄악이다. 더럽다'고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동성애자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림책을 낭독했던 그 마지막 날, 나는 하필 수많은 그림책 중 그 책을 들고 가서 쓴소리를 들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사랑해 너무나 너무나'를 들고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