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세계, 유무상생
살을 좀 빼고 싶어서 식단 조절을 해봤어.
아점으로 간단히 바나나 2개를 먹고, 저녁 시간을 기다렸지.
3시 정도가 되니 얼마나 배가 고픈지. 먹는 걸 참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인지.
6시가 되어서 왕돈까스를 먹었어. 얼마나 맛있었던지.
먹는 걸 참는 일이 돈까스를 못해도 3배는 더 맛있게 만들어주더라고.
없음과 있음은 하나의 세트야.
내가 지금 밥을 먹는 것이 ‘있음’이라면 , 밥을 먹지 않는 시간은 ‘없음‘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24시간 밥을 먹을 수 없듯이 즉, 있음만 있는 것은 없어.
밥을 먹는 ‘있음‘과 밥을 먹지 않는 ’없음‘은 언제나 한 세트로 존재하고,
밥을 먹지 않는 일이 밥을 먹는 일을 존재하게 하고, 심지어 엄청나게 도와주기도 해.
배고픔이(먹지 않는 행위, 즉 없음) 클수록 돈까스는 몇 배 더 맛있어지는 거지.
배고픔이 강할수록 즉 없음이 강해질 때, 돈까스를 몇 배 더 맛있게, 있음을 더 빛나게 해 주지.
그래서 다이어트는 힘든 거야.
뭘 대단히 하지는 않는 거 같은 데. 그 ’없음‘을 행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없음‘은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있음‘이 기능하도록 하는 위대한 행위야.
(인용 : 노자의 유무상생, 최진석 교수님)
‘밥을 먹지 않는 행위‘의 ’없음‘을 적극적으로 행함으로써, 구체적인 ‘밥을 먹는 행위’의 ‘있음’을 도와.
‘있음‘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우리가 컨트롤하고, 의식할 수 있어.
하지만 ‘없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손에 잘 잡히지 않지. 티가 나지 않아서 의식하기 어렵지. 그래서 ‘없음‘은 소외되기 쉬어.
누군가 블라블라 말을 하는 데, 말을 하는 ‘있음’은 들리고 뜻이 있어서 잘 보이는 데, 진작 그가 말하지 않는 ‘없음‘은 잘 안 보이지.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그것(‘없음‘)이 더 진실일 때도 많지.
세계는 ’있음‘과 ’없음‘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 데, ‘있음‘만 이야기한다면 분명 어떤 꿍긍이가 있는 게 아닐까?
비어 있는 공간은 구체적인 사물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고 기능하게 하는 묘한 교차점 같은 구실을 합니다. 구체적인 것들은 모두 이 비어있는 상태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차지할 공간이 필요하고, 무엇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기능을 가능케 해주는 여백이 필요합니다. 공간이 있어야 그 자리에 책상이 놓여 비로소 책상이 되고, 컵은 그 안에 텅 빈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컵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는 이 세계의 구체적인 것들이 비롯되는 곳이 됩니다.
- 108쪽,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by 최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