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 마약중독, 섹스중독, 끝없는 쾌락을 좇은 이들은 행복할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행복이 즐거움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보편적이고 타당한 생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 원칙으로 하는 공리주의에서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한다면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굳이 사회 전체의 공리로 따지지 않는다면, 개인의 욕망 충족으로 오는 쾌락을 근거로 중독자는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중독자의 삶이 행복해 보인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독된 당사자조차 자신이 행복하다 생각하지 않을 테다.
우리는 인생을 ‘희로애락’으로 표현한다. 인생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연속이다. 여기서 우리가 피하고 싶은 고통, 슬픔과 노여움을 제하고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을 누린다면 우리는 행복할까? 행복할 것만 같다. 이별의 슬픔, 죽음의 두려움, 고독의 외로움, 심신의 고통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 흔히 천국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그런 곳을 떠올리지 않던가. 오로지 물질적 풍요로움과 즐거움만 가득한 곳. 그런데 나는 왜인지 그곳에는 행복이 없을 것 같다.
행복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의 나라다. 행복은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다. 행복하다는 상태는 반대급부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고통이 있어야 쾌락이 있다. 쾌락은 부족한 욕망을 충족해야 발생하는 감정이고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은 고통이다. 필연적으로 고통과 쾌락은 함께할 때 무엇이 고통이고 쾌락인지 구분할 수 있다. 고통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무엇이 즐거운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즐거움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그것이 즐거움인지 알 수 없다. 평안함과 안식이 일상인 삶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메마른 무료함일 것이다.
나는 행복을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별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그래서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는 거라고. 그때 친구가 말했다. 행복은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를 따라 맺히는 열매 같은 거라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지며 열매가 맺히듯 행복도 그런 거라고. 행복은 손이 닿을 곳에 있다고 했다. 행복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는 그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고 부모님은 이혼 중이었다. 그런 내게 행복은 일상에 있다는 말은 재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아픔이 무뎌지고 기억도 가물가물 해질 때쯤, 나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누구나 말 못 할 슬픔 하나쯤은 갖고 산다. 살아보니 그랬다. 가족을 잃은 사람, 집이 망한 사람, 자신이 아픈 사람,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 하루한끼도 먹기 힘든 사람, 그런 사람이 참 많았다. 드러내 놓고 살지 않아도 가슴 한 구석에 그런 아픔은 누구나 있었다. 살아있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시련은 정도를 달리할 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간다.
나는 내게 닥친 시련을 원망했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큰 슬픔과 고통을 진 사람처럼 군 적도 있다. 그런 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됐다. 이런 마음가짐조차 힘든 일을 겪기 전에는 가져본 적이 없다. 만족스러운 상태에서도 만족한 적이 없고 배부른 상태에서도 배부르다 느낀 적 없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하찮게 만들고 남의 것을 탐내게 만들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잃고 나서야 만족할 수 있게 됐고 가지지 못해서 가질 수 있게 됐다. 행복은 일상에 있다. 그 말은 틀린 적이 없다.
어릴 적 시소를 탈 때, 친구와 내가 몸무게가 비슷해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고 그저 가만 일직선을 그린 적이 있다. 그런 상태로는 시소의 즐거움을 알 수 없다. 삶도 결국 업 앤 다운 없이는 재미없는 시소놀이일 뿐이다. 행복한 인생은 즐거움만을 좇는 삶이 아니라 필연적인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삶 속의 즐거움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