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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나를 깨우다

사라진 나를 위한 취향여행

by 지혜여니

그렇게 얼굴 속에서 잊혔던 나를 발견한 날,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나를 잊은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서점을 자주 방문한다. 좋아하는 책을 직접 고르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오랜 고민 끝에 한 권을 골라도, 집에 돌아가기 전 이미 다 읽어버리는 아이의 설렘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책장을 살피던 내 시야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들은 포켓몬 카드와 게임 코너에 몰두해 있었고, 딸은 아이돌 앨범과 포카를 보며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는 잠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자신만의 취향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지켜주고 싶었다. 덕후까지는 아니어도, 좋아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이들은 각자의 취향을 찾아가는데, 정작 나는 나의 취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잊고 살았을까?


그제야 나도 서점의 다른 코너들에 시선을 돌렸다.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채로운 색의 편지지, 알록달록 귀여운 스티커, 촉감이 좋은 노트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마음이 설레었다. 빨강머리 앤 노트를 손에 쥔 순간, 어린 시절의 내가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표지의 붉은 머리칼 색, 종이 냄새, 작은 삽화 하나하나가 모두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늘 꾸미고 만들기를 좋아했던 나를 다시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편지 쓰기를 즐겼던 소녀.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쓸 때면 글보다 꾸미는 과정에서 마음이 더 설렜다. 펜팔 친구와 주고받던 편지에서는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마법을 느꼈고, 대학 시절 군대 간 친구들에게 답장을 쓸 때는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위로의 감정이 친구에게 닿기를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다이어리는 늘 곁에 있었다. 새해가 되면 한 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점검하며 내 시간을 기록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행동을 온전히 담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도, 우연히 다이어리 속 기록들이 중요한 기준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과 육아에만 나를 온전히 바치면서, 나를 기록하던 다이어리는 아예 사라졌다. 아이들을 위한 육아일기는 꾸준히 적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은 멈춰버렸다. 내 취향보다는 아이들에게 더 시선을 돌렸다. 가족 구성원들의 성향에 맞춰 조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잊고 살아왔다.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면 자연스레 나의 자리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나 아닌 다른 가족들을 챙기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식사 준비를 해도, 여행 계획을 세워도 내 취향보다는 아이들 위주로 생각했다. 나를 위한 시간은 나중에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로 한 해씩 채워가다 보니, 내 취향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할 틈이 생기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점점 더 신경 쓸 일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워킹맘으로 지쳐가던 어느 날, 문득 혼자만의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성향답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때가 많았다. 내 기분보다 타인의 기분만 파악하며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어느덧 습관처럼 굳어져버렸다. 회사와 가정에만 에너지를 쏟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관계 속에서 나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시달리다가 퇴근 후 아이들을 돌보려니 내 마음을 돌볼 에너지조차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잊고 살았을까? 그것만이 지금 내 위치에서 최선이라고 믿으며 달리다 보니, 충전 없이 소진되기만 했다. 아이와 남편을 두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늘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를 위한 시간을 희생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남들을 두루 살펴보면 나를 지키면서도 가족을 잘 챙기는 이들도 많던데, 나는 왜 두 가지가 공존하지 못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헛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점점 지쳐가기만 했다.


모든 에너지가 다 소진되던 즈음, 직장 동료와 친구들이 조심스레 말했다.

“너의 표정을 보면 너무 지쳐 보여. 아이들을 사랑하려면 먼저 너 자신을 돌봐야 해.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봐. 그것이 너의 삶을 지키는 길이야.”

처음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위로의 말인 줄 알았지만, 대체 나보고 어찌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집을 부리며 버티다가, 괜히 가족들에게 화만 내는 나를 발견하고 몰래 휴가를 냈다. 지키려 애쓸수록 더더욱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긴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멍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어색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어, 근처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겼다. 낯선 경험이었지만, 책 속에 빠져들수록 현실의 나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한 혼자만의 시간은 조금씩 익숙해졌다. 신중하게 고른 책이 내 인생을 대변해 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내 감정이 서서히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커피 향과 종이 냄새, 잔잔히 흐르는 음악, 햇살이 드리우는 창가의 따스함, 주변 사람들의 낮은 속삭임까지 모두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책 속 문장 하나하나가 내 마음속에 스며들며, 잊고 있던 감정을 조용히 깨워주었다. 특별한 일을 계획하지 않아도 발길이 닿는 곳을 걸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온전히 느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세상의 공기가 나를 위로해 주는 기분이었다. 나 스스로 용기 내고 한계라는 껍질을 깨고 나오니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그 하루가 내 취향을 깨우고, 나를 다시 발견하게 해 주었다. 조용한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인식하고, 이전의 나를 들춰보았다. 친구들과의 교환일기도, 오래전 다이어리도 펼쳐보며 추억 속에 담긴 나를 찾아보았다. 그 당시에도 여러 고민과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단단히 세우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보였다. 그렇게 하나씩 나를 세워간 그 시간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잠깐 잊고 있었을 뿐,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나 스스로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면서.


집으로 돌아와 다이어리를 펼쳤다. 책을 읽다 끄적이기도 하고, 작은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담았다. 스티커를 붙이며 지난 한 주를 떠올리고, 순간의 감정을 메모에 남기기도 했다. 감사일기를 쓰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만 챙기느라 바빴던 시간을 나에게도 나누었다. 그 작은 시간들이 모여 서서히 나를 찾아가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을 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사라진 취향 속에 숨어 있던 나를 다시 발견했다.


내향적인 내 모습을 숨기고 가면처럼 밝게 행동했던 나, 혼자 있는 게 어색했던 내가 변하여 잔잔한 음악 속 커피 향을 즐기며 책을 읽는 나, 책 속 주인공에 나를 담아내며 숨겨진 나를 발견하는 순간 기뻤던 나, 타닥타닥 키보드로 글을 쓰는 나, 삐뚤거리며 손으로 사각거리며 일기를 쓰고, 아기자기 소품들을 좋아하는 나, 쇼핑을 좋아하고 발길 가는 대로 걷는 걸 좋아하는 나, 딸과 함께 다이소를 가면 예쁜 스티커를 보고 있는 나,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나 등등, 혼자만의 시간들을 채워가면서 사소하지만 나의 즐거움을 주는 일들을 찾아갔다. 의외의 모습도 인정하며 나를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보려 한다.


좋아했던 것들을 잊고 지낸 시간은, 곧 나 자신을 잊고 살아온 시간임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지켜보며, 내 안에 숨겨둔 소녀가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만났다. 스티커 한 장, 노트 한 권에도 마음이 설렜고, 오래전 소녀가 반짝이며 반겼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하나씩 찾아 채워가면서 내 가방에도 나를 채워 넣기로 했다. 잊힌 색과 향 속, 나도 숨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한 선택이 언제였는지 떠올리며, 나는 다시 나만의 작은 즐거움을 담기 시작했다. 나를 잊지 않고 사랑할 때,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자연스레 빛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취향은 잊힌 내가 나를 깨우는 가장 정확한 신호였다. 그래서 나는 이젠, 누군가의 취향이 아니라, 나의 취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로 했다.




[함께하는 작가]

지혜여니, 따름, 다정한 태쁘, 김수다, 바람꽃, 아델린, 한빛나, 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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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