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되찾는 작은 공간들
퇴사하고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처음엔 좋았다.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선택은 내 결정이었다. 사라졌던 나를 다시 찾을 기회가 열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무엇을 먼저 할지 고민하며 그 계획들을 차근히 실천해 나갔다. 한결 넓어진 시간 속에서 억지로가 아닌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오래 잊고 지냈던 안도감을 주었다. 금방 나를 되찾고, 내 삶을 내 속도대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생겼다. 그래서 회사 다닐 때와 비슷한 시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촘촘하게 채웠다. 마치 오랜 시간 쳇바퀴처럼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강연을 듣고, 아이들을 챙기고, 식단을 짜고, 집을 정리하고, 취미와 운동까지 더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바빠졌다.
남편은 “쉬라고 했더니 더 바쁜 것 같다”라고 말했고, 나는 “원래 백수가 과로사하는 거라던데?”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일수록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비어 갔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의 자유도 생겼는데 마음은 오히려 텅 빈 느낌이었다.
어느 날,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청소를 마친 뒤 커피를 들고 거실에 가만히 앉았다. 햇살이 바닥에 비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집 안 이 넓은 공간 어디에도 ‘나만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퇴사 후 내게 가장 강했던 감정은 “이제 무엇을 하지?”가 아니라 “이제 어디에 있어야 하지?”였다. 집은 여전히 역할과 해야 할 일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쉬는 듯한 순간도 금세 다음 업무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회사에는 내 책상, 내 컴퓨터, 내 서랍, 내가 읽던 책들이 있었다. 어쩌면 집보다 회사가 더 나의 공간에 가까웠다. 집보다 회사가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물건들로 집이 채워질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고, 회사에서의 한 평 남짓한 자리에 나를 옮겨 살았다. 그러나 퇴사와 함께 그 공간마저 잃었다. 집으로 가져온 짐들은 어느 곳에도 자리 잡지 못한 채 베란다 구석에 쌓여 있었다. 시간과 자유가 생기자 역설적으로 내 공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먼저 밖으로 나갔다. 하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어진 길은 생각보다 길었고, 다시 걸을수록 몸이 아니라 마음속 막힌 통로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걷다 보면 생각이 덜 복잡해졌고, 걸음마다 나를 정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를 잃지 않으려면, 이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시간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걷고 나면 자연스럽게 카페로 향했다. 집 앞 작은 카페든, 스타벅스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곳에서 '엄마', '직원', 그 누구의 역할도 아닌 ‘나’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카페의 창가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면 햇살이 테이블 위로 스며들었다. 그 커피 향기 속에서 생각보다 너무 오래 숨을 참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는 늘 무언가를 해내야 했고, 해내지 않으면 금세 해야 할 일들이 쌓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책을 읽으며 내 안의 막힌 감정들이 열렸다. 책 속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또, 써 내려가는 글 속에서 오래 묵혀둔 마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글쓰기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대화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공간이 주는 여유가, 나에게 숨 쉴 틈과 존재감을 주었다.” 그 문장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하천 산책은 내 하루를 리셋하는 버튼이 되었고, 카페 창가의 테이블은 내 마음을 받아 적는 작은 서재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집에도 나의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읽지 않는 아이들 책을 정리하고,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내 책들로 책장을 채웠다. 제목들만 보아도 내가 걸어온 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나의 취향을 하나씩 쌓아 갔다.
식탁 한쪽에 작은 글쓰기 공간도 마련했다. 필사와 일기를 쓰는 자리였다. 좋아하는 펜, 색색 형광펜, 감촉 좋은 연필과 작은 지우개, 학생 때 갖고 싶었던 학용품들로 내 취향을 채워 넣었다. 오늘의 마음을 어떤 펜으로 기록할지 고민하는 시간조차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순간 같았다. 오래된 노트북을 다시 꺼내 놓고,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그 작은 구석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집의 식탁 옆 작은 공간, 하천 산책로, 그리고 집 앞 두 곳의 창가 카페. 그곳들은 언제든 숨이 막힐 때 찾으면 다시 살아나는 나만의 숨구멍이 되었다. 그 공간들 속에서 써 내려간 문장들이 모여 인생의 한 조각이 되었고, 그렇게 쌓인 이야기 끝에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만,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집은 여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집 밖에서는 또 다른 나로 살아가고 있다. 이 두 공간을 오가는 리듬이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경로가 되어 주었다.
[함께하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