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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여행자 이주현 May 04. 2024

나만 알고싶은 숲길, 둔전계곡

양양의 숨은 명소 - 진전사 둔전계곡 상류 


생각지 못한 좋은 곳을 발견했을 때, 꽁꽁 숨겨두고 나만 알고싶은 곳이 있다. 

양양 진전사 입구를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둔전계곡 숲길이 그런 곳이다. 

처음 둔전계곡을 알게 된 건, 양양의 숨은 매력을 찾아내고자 하는, 나름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였다. 


양양의 관계 인구로 살기 시작한지 벌써 일년 가까이 되었다. 

어촌신활력 증진사업이라는 지역활성화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지난해 5월부터 일주일에 짧으면 이틀, 길면 사나흘을 양양에서 지내고 있다. 

 

양양의 관계인구로 살게 해준 어촌신활력증진사업이 펼쳐지는 후진항과 설악해변. 


양양은 인구 죽도 해변으로 시작해서, 하조대의 서피비치가 해변의 화려한 밤 문화를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성지가 되면서, 서핑 명소로 핫해진 곳이다. 

하지만 서핑이라는 레저 스포츠를 우리 사회에 처음 알린 서퍼들은 엄청나게 치솟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인구 죽도를 떠나 양양의 다른 해변으로, 멀게는 삼척과 고성까지 하나 둘 씩 떠나기 시작했다. 소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서울에서 170킬로 거리인 이 곳 양양에도 어김없이 찾아든 것이다. 

게다가 적지않은 이들이 서핑 문화가 지나치게 향락 문화로 변질되었고,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양양이 가진 다양한 매력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소개해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거창한 사명감까지는 아니어도, 지인들이 방문하면 데려갈 널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를 찾아내고 싶었고, 당분간 살아갈 이곳에서 마음이 지칠때면 찾아갈 나만의 퀘렌시아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처음 찾아낸 나만의 첫번째 숨은 명소가 바로 진전사 둔전계곡이다. 


진전사 입구에서 둔전계곡 쪽을 향하는 길 왼쪽으로 처음 만나게 되는 설악 저수지
비오는 산책길에 처음 만난 개구리. 점박이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무당개구리인 듯


처음 찾은 날은 지난해 6월 비오는 일요일 오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평소 등산과 트래킹을 즐기는 편이라, 설악산 자락으로 향하는 숨겨진 등산로를 찾고자 지도 앱을 켜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우연히 진전사 입구까지 오게 되었다. 

한적한 도로를 달려 진전사로 오르는 입구에서 차길은 끊어지는데, 차를 세우고 좀더 앞으로 걸어가보니, 조용하고 울창한 숲으로 향하는 산책로가 이어졌다.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세계 곳곳의 트래킹 여행을 많이 다녔다. 

잘 닦여진 길에서 살짝 벗어나,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한걸음만 들어서면, 생각지도 않았던 비경을 만나게 되는 걸 여러차례 경험했다. 

뉴질랜드 루트번 트랙에선 키서밋 뷰포인트를 지나 숲으로 한걸음 들어선 덕분에 호수와 설산이 끝없이 펼쳐진 장관을 마주했고, 야쿠시마 종주 트래킹에선 등산로를 살짝 벗어난 바위에 오른 덕에 원령공주가 금방이라도 내려올것 같은 운해에 둘러쌓인 능선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둔전계곡 상류를 발견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이 곳을 찾은 지 오늘로 네번째. 네번 모두 여름 휴가철이나 황금 연휴 시즌에 찾았음에도, 곳을 걷는 다른 일행들과 마주친건 한번뿐이다. 기암괴석이 펼쳐진 수려한 풍경은 아니지만, 자연 그대로의 숲길과 설악의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오는 계곡을 오롯이 혼자서 차지할 수 있는 건 작지않은 행운이다. 


적당한 그늘과 시원한 조망이 조화를 이룬 산책로. 왼쪽은 설악 저수지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너른 바위와 시원한 그늘


날이 좋으면 쨍한 하늘아래 눈부신 초록 빛깔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고, 가늘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단체로 소풍을 나온 개구리들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찾았던 비오는 오후의 둔전 계곡이 더 인상적이었다. 계곡을 가득 채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쉬운 건, 길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저수지를 따라 15분 정도 걸으면, 약간의 오르막 산길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15분 정도 더 걸으면 길이 흐릿해지다가 출입금지 푯말이 나온다. 지정 등산로가 아닌 길로 오르는 걸 더 좋아하는 산꾼들에겐 여기서부터 더 큰 유혹이 시작되겠지만, 인적이 없고 험한 길이니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게 좋겠다. 


진전사 입구에서 30분 정도 오르면 만나게 되는 출입금지 푯말
산길로 들어서고 나서 곧 만나게되는 샘물. 바위틈 사이로 내려오는 물맛이 시원하다


지형상으로 볼 땐, 화채능선이나 화채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을 법도 하다. 길이 험해서 안전을 위해 출입을 금지한건지, 자연을 지키기 위해 휴식년제를 운영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안전을 위해서든 자연을 위해서든 여기서 발걸음을 멈추고, 계곡으로 내려가 너른 바위에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거나,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물아일체의 시간을 즐겨보자.   

마침 계곡 아래로 편하게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산책로가 끊기는 즈음에 있다.  


꽤 깊은 소도 있다. 올 여름엔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겨볼까싶다
산책로가 끊기는 즈음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많이 아쉬운 거리. 걷는 걸 싫어하거나 무릎이 불편한 이들에겐 딱 적당한 거리. 편도 30분동안 만날 있는 양양의 숨은 명소 둔전계곡. 

좀더 많은 이들이 이곳의 매력을 알게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지금처럼 아무도 찾지않는 나만의 시공간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서 줄다리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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