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한 해의 시작을 나라의 좋은 기운이 서려 있는 궁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창덕궁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거대한 고목을 만났는데요.
300년~400년 된 나무라는 안내판을 보고 새삼 이곳, 한 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 존재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그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인간은 100살도 채 살지 못하는데, 이렇게 아등바등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다니.
인간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닐까.
세상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아는 세상보다 알 수 없는 세상이 더 크게 존재하는데 가끔은 나의 미약함을 일깨워 주는 이러한 존재들을 만날 때면 숙연해지곤 합니다.
이 나무를 보면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책 웨인 다이어의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창덕궁에 몇번이나 가볼까요? 저는 이번에 두번 째로 간 것 같아요.
처음 간 것도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경복궁은 여러 번 가봤지만요.
이번에 희한하게 오래된 나무가 눈에 들어와 이것저것 창덕궁에 대해 찾아보다가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 알고 계시는지, 저만 몰랐던 건지 궁금하네요^^;;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궁궐로 조선시대 동궐(東闕)이라 불렸는데요.
1405년(태종 5년)에 경복궁에 이어 두번 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입니다. 오히려 정궁인 경복궁보다 임금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으로 정사 업무를 보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나라의 주요 행사를 치르는 곳이었습니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궁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요.
특히 예전에는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祕苑)'이라 불렸던 창덕궁 후원은 135,200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왕실 후원으로 임금이 사랑했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깃든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창덕궁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래된 나무가 무려 11그루가 있습니다.
창덕궁 고건물 배치도에는 향나무 1주(194호), 회화나무 8주(472호), 뽕나무 1주(471호), 다래나무 1주(251호)가 표시되어 있는데요.
정문인 돈화문에 들어서면 회화나무 군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왼쪽에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상징하는 회화나무 3그루가 먼저 보입니다.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창덕궁을 다 돌아 보고 나올 때 금호문 가까이에도 회화나무 1그루가 있습니다. 돈화문을 중심으로 보면 왼쪽에 4그루, 오른쪽에 4그루가 있는 셈입니다.
이 회화나무 군의 수령은 300~4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1820년대 제작된 '동궐도'에도 그려져 있으니 그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회화나무는 옛날부터 마을 근처에 흔히 심어오던 낙엽지는 활엽수로서, 궁궐 입구 주변에 이렇게 회화나무를 심은 이유는 회화나무는 가지가 제멋대로 뻗는 특징이 있는데, 이를 옛 사람들은 학자의 기개같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국 궁궐 건축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이 중 삼공의 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 좌석의 표지(標識)로 삼았다'고 하니 회화나무는 삼공 위계(位階)의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이면 1724년입니다. 400년 전이면 1624년이 되겠네요.
처음에는 안내판에 쓰여진 수령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가 계산을 해보니 새삼 나무가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1624년은 조선 인조 2년으로 1월 24일에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부원수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2월 8일에 임금은 공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날엔 난민들에 의해 궁궐이 불타기도 했답니다. 역모로 난을 일으켰던 이괄은 2월 15일 죽임을 당했고, 임금은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데요. 반군에 의해 살해된 도성민이 80여 명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300년 전 1724년으로 가 볼까요?
조선 경종 4년, 2월 11일 청의 사신이 한성에 왔었고, 3월 17일에도 왔었나 봅니다. 사신을 맞이하는 곳은 창덕궁이었으니 돈화문을 지났을 수도 있었겠네요.
8월 25일에는 국상이 있었습니다. 경종, 임금이 창경궁에서 승하했다는 기록이 있네요.
6일 안에 다음 왕이 정해져야 하는데, 5일 후 8월 30일 왕세제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즉위했다고 합니다. 이때 임금이 영조입니다. 영조는 이후 52년 동안 임금의 자리를 지키는데 조선 왕조 역대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지위를 유지한 인물입니다.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결혼식, 세자책봉식,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이 거행되었다고 하는데,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왕의 즉위식은 인정전이 아니라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인정문에서 행해졌다고 합니다. 선왕의 장례 중에 치르게 되므로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인정전을 향해 들어감으로써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정문에 나아가 즉위했다'는 기록으로 사극의 장면과 겹치면서 상상이 되었습니다.
300년 전과 400년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 해를 살펴보았는데, 역사적으로 아주 큰 일이 있었던 해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무의 나이를 따라가다 보니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해 중에 1724년을 봤는데 영조가 즉위한 해라니.
나무들이 그즈음 심어졌다고 하면 400년 전 궁궐이 불탄 이후였을까요? 1624년 2월 8일 난민들에 의해 궁궐이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경복궁인지 창덕궁인지 정확한 장소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나무가 서 있는 그 자리는 역사적인 수많은 일들이, 사건들이 일어났던 자리로 그 모든걸 다 지켜보았을텐데 어떤 기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어느 줄기는 이미 생명이 다했고, 어느 줄기는 기형으로 자랐기도 한 나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이런 모양이 되도록 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알겠습니까.
이왕 찾는 김에 잠깐 창덕궁에 대해 더 살펴 보고자 합니다.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전소되었지만, 1610년에 복구가 완료되어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았다고 함.
1623년 4월 11일 인조반정이 일어나 궁궐 대부분이 소실. 이후 1647년 인조 25년에 재건.
재건 당시 인조는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고, 이후 효명세자가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이 됨.
정문인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에 재건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완공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궁궐의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이라고 함.
인정문은 정전인 인정전의 입구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 왕조의 여러 임금들이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
인정전은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일)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주위는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음.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복구.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 순종 즉위 후 창덕궁은 황궁이 됨.
일제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됨.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개조·이건.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선원전을 지었다고 함.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본격적으로 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깊은 역사를 가진 드넓은 고궁이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창덕궁의 낙선재
왕이 책을 읽고 쉬는 공간, 즉 서재 겸 사랑채로 조성되었다. 국상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는 공간이었다고도 전해진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되었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순종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1963~1970년 영친왕 이은, 1966~1989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가 기거한 곳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는 1926년 순종이 영면한 후 석복헌에서 생활하였고 1966년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1968~1989년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죽음을 맞았다.
그냥 그랬다.
오랜 시간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나의 지금과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고,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어제 죽은 사람은 오늘 이 순간을 보지 못할 것이고, 살아 있으니 이처럼 고귀한 존재도 만날 수 있으니.
새해를 맞아 이 나라의 중요한 기운이 가득한 고궁을 거닌 일은 아주 잘한 일 같다.
날이 좀 풀리면 또 한번 가보고 싶다.
https://youtu.be/YPQLp_mEqL4?si=FiyMB1WXFYnZYOB9
***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회화나무 군 [昌德宮─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낙선재 [Nakseonjae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昌德宮 樂善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울 육백년사 연표
유튜브 '주피디의 역사 여행' 창덕궁 편, 성세정TV 수상한 여행, KBS다큐 등
@bysummer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지.
그게 편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