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시간적으로 정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이전에 한 목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일 예배는 언제부터 시작인가? 예배가 시작되는 11시부터, 혹은 아침에 일어나 예배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어쩌면 예배를 위한 절제가 시작되는 토요일부터일 수도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충전하는 주일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일상에서의 예배입니다. 이 두 예배가 올바른 균형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내가 한 주 동안 살아온 내 모든 삶을 재물로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한 주 동안의 삶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할 제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물은 단순히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절 읽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죽여서 드리는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의 육신에 누적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순히 예배 시간을 잘 지킨다거나, 예배 시간 동안 찬양과 말씀에 집중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주 동안의 삶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주일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과 깨달음을 주시고 또 한 주 동안 살아갈 힘과 지혜를 허락해 주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판단에 의지하여 한 주 동안 살다가 주일에 모여 지체들의 삶을 보고 형제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함께 한 마음과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나의 고집과 편향된 생각을 꺾고,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며, 한 주 동안 자신의 다짐과 신앙 고백을 실천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개념적으로는 주일 예배와 우리의 삶의 예배로 나눌 수 있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배’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마치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차와 같습니다. 주일 예배는 충전소이고, 삶의 예배는 도로입니다. 도로 위를 열심히 달리지만, 충전소에 들리지 않는 전기차는 결국 도로 위에서 멈춰 서게 됩니다. 이런 전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충전소는 계속 들리지만, 도로 주행을 하지 않는 전기차도 마찬가지로 목적지에 결코 도착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전기차들이 멈춰 서지 않도록, 짧은 거리마다 계속해서 충전소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벽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그리고 토요일은 각종 프로그램과 주일에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3~4회에 걸쳐 예배를 드리며 언제든지 방문해 충전할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안타깝게도, 저희 교회는 대안 교회로서 이러한 친절함을 베풀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림 교회는 주일에 단 한 번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은 마치 일반적인 고속도로에는 보통 40km마다 충전소가 하나씩 있는데, 살림고속도로에 진입하면 200km에 한 번씩만 충전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전기차 차주는 이 고속도로에서는 반드시 충전소를 놓지면 안 됩니다. 단 한 번만 놓쳐도 차가 설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저는 효율이 좋아서 예배를 한 번만 드려도 한 달은 은혜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일에 우리를 채워주는 양은 한 달치가 될 수 없습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가야 할 목적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오늘 가야 할 곳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곳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라.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출 13:21-22)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길을 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앙인의 삶은 매일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찾고 그곳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모든 삶의 길을 단번에 비추는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아니라, 내가 다음 내딛을 곳만 비추는 발등 위에 놓인 작은 등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달 동안 한 번의 말씀과 한 번의 예배로 잘 지낸다는 고백은, 매일마다 자신의 삶을 인도해 주는 등불이 꺼져 있었으므로, 사실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본체는 곧 하나님과 동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4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눅 4:1) 인간이 아닌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서 온전한 육신을 경험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며 사셨는데,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말씀과 성령에 대한 갈급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은 완성의 상태가 아니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지속적인 목마름의 상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편 기자는 42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대한 갈급함을 회복하십시오. 신앙의 정수는 성령으로 충만하거나 약속이 성취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이루실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목마른 상태야 말로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신앙의 정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배를 잘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예배를 드리지 않을 이유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 혹은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본질은 바로 예배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예배를 드립니다. 목마른 사슴 눈에는 오로지 시냇물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배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에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새벽 일찍 산에 자주 가셨습니다. 종종 남한산성에 갈 때는 꼭 차량 트렁크에 거대한 생수통을 몇 개씩 챙기셨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생수통은 산에서 나오는 약수로 가득했습니다. 약수는 항상 흘러넘치기 때문에, 통을 조금 가져가면 조금만 떠오는 것이고, 통을 많이 가져가면 많이 떠오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부족하지 않고 넘치므로, 예배의 자리에 비워 오는 우리의 마음, 즉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마음만큼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한 주 동안 영적으로 긴 거리를 운행한 전기차는 충전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충전소에서 많은 양을 충전하게 됩니다. 반면 한 주 동안 영적으로 움직이 없는 전기차는 충전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충전소에 간다 하더라도 충전으로 채워지는 양도 없습니다. 그러니 충전소에 갈 이유보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훨씬 많고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 셋째가 독특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하나 샀습니다. 그 그림은 휴대폰이나 패드 오른쪽 상단에 배터리 표시가 그려져 있는데, 배터리 수치가 1%로 표현된, 즉 바로 충전을 해야 한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이 자기에게 보기만 해도 불안감이 느껴지니 빨리 충전하고 오라는 장난을 쳤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용하는 휴대폰이나 패드, 혹은 노트북 배터리가 1% 남았다고 합시다. 여러분의 온 신경은 이것이 작동을 멈추지 않도록 충전기와 충전기 선을 찾는데 집중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영적으로 1%에 처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충만함이 아니라, 갈급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며 참 예배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