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49살이 되어서야 엄마가 보고 싶어 졌다.
나에 대해서 솔직해지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보여지는 나의 외모에 보여지지 않는 나의 일상을 굳이 생각해내고 싶지 않아서 이다.
아니다 어쩌면 49살을 살아오면서 불편한 진실에 대한 회고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24개로 쪼개서 살아온 시간들.
한 번도 멈춤 없이 계속 전력질주만 했다.
또 운이라는 놈이 내 등을 떠밀어 술술 풀린 것도 있지만,
나는 어쩌면 나의 솔직함을 인식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황신혜라는 닉네임으로 통했던 2살 언니와
강호동이라 해도 믿을 만큼 똑 닮은 2살 아래 남동생.
나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학창 시절.
언니와 남동생은 수학 과외를 했지만
나는 학원 한번 다녀본 적이 없었다.
80년대를 강타한 나이키 운동화가 처음 한국에 상륙하였을 때,
엄마는 3개의 나이키 운동화를 사 오셨다.
언니와 남동생은 밑창이 빠지는 12,000원짜리 프리미엄 운동화
나는 밑창이 본드로 붙어있는 9,800원짜리 대중 운동화
나는 그날 지붕이 떠나가라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마른하늘에 먼지 폴폴나게 펑펑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분명히 나는 어디서 주워 온 아이라서 분명히 나를 찾는 다른 엄마가 있을 거라고.
계모일지도 모르는 엄마가 미웠다.
나는 열심히 달렸다.
스타일리스트로 유명도 해봤고, 스타일리스트로 박사도 받았으며,
스타일리스트학과 학과장 교수로 재직하다가 작년 2학기를 끝으로 사직을 하였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나의 딸과 아들, 그리고 사직한 나는 24시간 같은 공간에 있게 되었다.
난생처음 직면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서로 학교도 가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고 일도 해야 했으니깐.
오로시 엄마가 되어보았다.
삼시 세 끼를 차려주고, 집안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집에만 있기가 답답한 아들 녀석 자전거 타는 것도 봐주고,
뜻밖에도 나는 육아와 가사에 트리플 적성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는 나의 첫째 딸은 지극히 내성적인 데다가 소심하고 겁도 많았다.
학교에서 괴롭히는 아이들이 나타나면
언제, 어디서나 슈퍼우먼처럼 나타나 바로 해결하는 엄마가 있다.
36살에 첫딸을 낳고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아이를 키웠다.
10개월 때부터 프뢰벨 가정방문교육부터 1살 때 짐보리, 발레, 영어 등 문화센터를 다녔다.
아이는 6살에 한글을 뗏으며, 자기 주도식 학습이 가능한 집중도가 높은 아이로 성장하였다.
주변사람들에게 모델링이 되는 육아를 하였다.
아이에게 나는 다 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에 대한 생각들을 우연히 정리하게 되었다.
어느덧 내 나이가 49살이라니 진짜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45살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었는데
대학교수가 되고,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어쩜 그 시간은 내가 즐겼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엄마는 44살에 암투병 중 돌아가셨다.
가난했던 그 시절 치료를 받는데도 한계가 있으셨는지 그냥 버티시다가 돌아가셨다.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어 살이 바짝 마른 모습이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엄마의 고통이 사라져서 하늘나라에서는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다.
밤새 엄청 비가 왔다.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맑게 뜬다.
일상으로 복귀가 힘들고 계속 지체되고 있다.
이제 좀 쉬어도 된다고 주변에서는 이야기 하지만,
나를 정면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없다.
보여지는 나는 운이 술술 풀리는 슈퍼우먼이라 생각을 한다.
당당한 내 모습에 사람들은 '위로 따위가 뭐가 필요해?' 하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49년을 혼자 전력 질주하며 성장해왔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 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나를 혼자서도 전력질주할 수 있게 키웠잖아 ! 엄마 나 이제 어떻게 해?''
엄마의 살내가 스멀스멀 나는 것 같다.
나는 49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엄마가 미운 게 아니라 엄마가 보고 싶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