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이야기. 힘들면 힘들다고 시그널을 보내봐.
새벽에 전화 한 통이 왔다. 전화기 안에서는 엉엉 울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횡설수설에 가까워서 주어를 찾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우선은 그녀의 편이 되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시계는 오전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간에 그것도 그녀가 결혼한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녀와 나는 일하는 관계로 만났다. 카페의 구인 글을 올려서 만나게 된 미순이는 첫인상이 이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몇 편의 영화를 같이 찍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하였다. 미순이는 참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몇 번의 연애를 거쳐서 그녀는 드디어 결혼을 하였다. 결혼식장에서 풋풋했던 미순이의 첫 만남의 수수함이 묻어났다. 오래오래 백년해로하면서 잘살기를 빌어줬다.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드라마 첫 출연 예정인 신인 여배우인데 함 봐달라고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영지는 커다란 눈망울에서 그렁그렁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만 같은 감성을 지닌 소녀였다. 이제 21살이 되었다고 하였다. 가로수길의 원룸에서 연예인이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중이라고 하였다. 아직 볼살이 통통한 영지는 빛바랜 스키니진과 퍼프소매의 화이트 티셔츠에 레이어드 한 실키한 끈나시 블라우스가 많이 어색했다. 아직은 그녀에게 적당히 남아있는 촌티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있을 리딩과 핏팅에 관한 미팅을 마치고 헤어졌다. 오늘의 미팅은 대사 몇 마디 없지만 매니지먼트 계약을 하고 고정배역을 따낸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녀에겐 가슴이 벅찰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오늘이 하나의 일로써 그냥 스치는 일이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계속 눈에 되 씹피고 있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미순이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녀의 미래에 대한 플렌은 현모양처였다. 영화판에서만 12년 그녀의 20대의 풋풋함은 결혼과 함께 그간의 힘듬으로 몸이 기억하는 듯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미순이가 청담동에 나올 일이 있다면 연락이 왔다. 버버리 코트를 걸친 그녀의 얼굴엔 뭔가 모를 삶의 만족감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녀를 여성스럽게 만들어주던 긴 머리도 단발로 자르고 하드 한 버버리 코트는 그녀를 헤비 해 보이게 하였다. 잠깐의 시간에 미순이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한 것 마냥 보였다.
"임신한 거야?"
"임신 준비 중인데 좋은 한의원 좀 소개해주세요."
임신을 준비 중이라 몸을 만들고 있다는 미순이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몸이 많이 불어있었다. 단발의 부은 몸의 그녀는 그간의 이미지와는 사뭇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영화 현장이 아닌 뜨개방을 하기 위해 요즘은 학원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하였다. 남편의 안부를 묻는다. 영화 작업을 하느라 바쁘다고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알뜰하게 장을 보고 상을 차리고 뜨개질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작업실에 들러 오늘의 촬영 의상들을 부산하게 정리하고 매니저 카니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모닝커피가 오늘따라 조금 쓰다는 생각을 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실장님 큰일 났어요. 영지가 지금........"
매니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첫 데뷔인데 그렇게 연예인이 되겠다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원룸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한 번에 고정을 따냈는데.... 그녀가 연락을 안 받아 문을 연 원룸에서 그녀는 쓸쓸하게 숨을 쉬지 않았다고 하였다.
커피를 마주한 미순이는 시선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뭐가 잘 못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남편이 영화가 끝나고 다음 작품까지의 공백기가 시작되면서 둘은 사소한 걸로 싸우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영화인들은 공백기가 생기면 수입이 없다. 그간의 통장에 모인돈으로 그 시간을 벼터야한다. 그 공백기가 미순이 부부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동갑인 부부는 처음엔 사소한 말싸움으로 시작해서 고성이 오가고 남편이 집을 나가고 그리고 미순이가 자살시도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미순이는 그냥 흔한 부부싸움을 한 것이라고 머뭇머뭇 말을 하고 있었다.
"참 힘들었겠구나. 너의 맘을 이해하는데 그래도 부부간에 보이지 말아야 할 경계가 있는데.... 너무 멀리 가버렸네. "
미순이가 바짝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은 이혼을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나에겐 어린 시절 사진들이 별로 없다.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두살 터울의 남동생이 사진 속의 나의 자리를 다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의 친척들이나 아니면 이웃에게 맡겨졌고, 엄마는 언니나 남동생만을 데리고 동네 아줌마들이랑 놀러를 다니셨다.
6살 때인가 그날도 아마 언니와 남동생만 데리고 친목회에서 놀러 간 날인 듯싶다. 언니와 남동생은 신이 나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선다. 잔뜩 심술 이난 나는 그런 엄마와 언니, 남동생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다.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날 나는 엄마가 출발한 아침 7시부터 해가 지는 저녁 6시까지 대문 앞에 앉아서 목이 터져라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나를 보면 고집불통이라고 하였다.
엄마의 옷장을 연다.
친목회에서 야유회를 가기 위한 플라워 프린트의 원피스가 보인다. 에나멜 가는 벨트의 작은 나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나의 검은색 멜빵 스커트가 앙증맞게 엄마 옷 옆에 걸려있다. 그때의 서러움이 작은 옷에서 묻어나는 것 같다.
21살의 영지는 촬영을 앞두고 우울증과 데뷔의 두려움으로 작은 원룸에서 생을 마감했다. 연예계에 발도 디디지 않은 상황이라 작은 뉴스도 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소리 없이 마무리되었다. 촬영을 하지 못한 옷을 정리하면서 차라리 소리 내서 엉엉 울거나 생떼를 쓰지 못한 영지가 한없이 미웠다.
이혼절차가 끝났다고 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미련을 가슴에 품은 미순이는 툭 건드리기만 하면 곡을 하면서 울 것만 같았다. 다시 그녀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영화일을 시작하였고 그녀의 머리도 다시 길게 늘어뜨려졌다. 이제는 의상실장이 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는 남편의 그림자를 쫒았다니는 듯 가끔씩 남편의 SNS에 들어가는 듯했다. 그냥 멍울이 지워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엔 미순이는 그렇게 힘들게 그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앨범을 열어본다.
작은 검은색 멜빵 스커트를 입고 하얀색 스타킹을 신은 나는 배를 앞으로 내밀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짧게 자른 머리는 엉클어져 한쪽으로 올라가 있고 얼굴엔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도 엄마는 심술쟁이에다가 떼쟁이라고 생각한 나의 그 모습을 증빙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그 사진 안의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애기를 몸으로 하고 있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