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훈련 일지 D-21
*금주의 러닝(3/7)
수: 4.01km/6’42”
금: 4.00km/7’01”
일: 5.96km/6’11”
9월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공기가 선선해지고 해가 짧아졌다. 바야흐로 뛰기 좋은 시기가 왔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이 시기는 아주 금방 지나가고 마는 찰나일 거라는 걸.
이 좋은 시기에 가만히 앉아서 주변 러닝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만 있자니 좀이 쑤셨다. 러닝을 중단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도 이제 2주가 넘었는데, 슬슬 다시 뛰어보면서 회복되었는지 점검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2주 만에 뛰는 밤공기가 너무 상쾌하고 기분 좋았다.
다리도 처음 다쳤을 당시에 비해서 확실히 좋아진 게 느껴졌다. 물론 간헐적으로 찌릿찌릿해오는 게 완전히 나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처참한 것은 손목에 찬 시계에서 보이는 심박수와 페이스였다. 6’42”라는 다소 느린 페이스에도 불구하고 심박은 170을 찍고 있었다. 러닝은 참 정직해서, 뛰기만 하면 무조건 조금씩 는다. 하지만 기량이 떨어지는 속도는 실력이 느는 속도보다 3배는 빠른 것 같다. 2주 쉬었다고, 지난 한 달 반 훈련했던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야속하다.
아직도 아프다는 내 말에 남자친구가 대회 뛸 수 있겠냐며 걱정을 해줬다. 나는 “어쩌겠어, 해봐야지.”라고만 대답했다. 나 역시 자꾸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불안은 사실 불필요한 감정이다. 나는 단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회복을 하거나 기량을 유지해서 대회 당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회복과 기량 유지 두 가지를 다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나날이 깨닫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일요일 새벽 훈련을 나갔다. 7월 초부터 12주 동안 이루어진 훈련의 마지막날이었다. 처음 이 훈련을 참여하기로 한 날에는 훈련 커리큘럼대로 20km, 25km, 30km, 35km를 점차 완주해 나가며 차근차근 대회를 준비해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테이퍼링을 위해 다소 강도가 약했던 오늘의 10km 인터벌 훈련에서, 나는 3~4km만에 멈추는 것을 택했다. 원래 뛸 때는 음악과 주변의 풍경에 젖어드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데 부상을 안고 뛰니까, 뛰는 내내 내 신경은 오직 다리의 감각에만 날카롭게 곤두서있었다. 고관절과 종아리, 발목, 발바닥까지 찌릿한 느낌이 들 때마다 더 뛰어도 될지 말지를 고민했고, 결국 회복을 택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멈췄다. 멈춰 선 나를 두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너무 부러웠다.
너무 부러웠다. 그들이 지금 느끼고 있을 기분은 나도 익히 아는 기분이었다. 땀 흘리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남은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내가 완주해 낼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는 그 기분. 불과 얼마 전까지, 30km를 완주하고 단단히 신이 났을 그 시기에 나는 러닝을 할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는 몰랐다. 신경 쓰이는 육체의 불편함 없이 자유롭게 뛸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프게 되니까 그제야 지금 내가 잃어버린 것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보니, 이번 주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약속이 있어서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퇴근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중 한 분과 함께 약속 장소로 차를 타고 가던 중, 하늘에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마치 유화물감을 붓으로 칠한 것 같이 푸른색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그 하늘을 보면서, 나는 옆 자리 동료분께 말했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요즘 하늘이 정말 너무 예뻐서 감탄하는데, 그 아름다움을 느낄 때마다 저는 제가 저런 걸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구나, 지금 행복하구나 생각해요.”
주변에 있는 것들에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는 그런 때가 있다. 감각신경이 어딘가 고장나버린 느낌, 아니 감각신경에서 전해지는 감각을 뇌가 처리하지 못하는 그 느낌이다. 나에게 그 순간은 작년에 한창 업무스트레스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병가를 썼던 그 시기였다. 그때 느꼈던 무감흥의 감각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내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지금은 아름다움을 알 수 있으니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찬가지로 그 감각을 느껴본 적 있는 동료분과 함께 그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더란다.
오늘 화창한 하늘 아래를 땀 흘리며 달리는 러닝크루 동료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내 핸드폰 카메라에 담긴 그들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언젠가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의 이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내가 저분들과 함께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때가 오면, 지금의 이 처량하고 속상한 마음을 기억했다가 그 자유로움을 실컷 만끽해야지. 지금의 부상 덕분에 그때의 나는 더욱 매 러닝을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낄 수 있게 됐을 거야.
삶은 예상대로 안 되지만 삶의 모든 것은 나름의 의미를 내가 붙이기 나름이다. 차근차근 완주해 나가는 과정을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과 다르게 매주 찡찡거리고 정신승리하는 과정의 반복인 이 훈련 일기는, 과연 어떤 의미로 마무리 짓게 될까? 불안해하기보다는 다만 흥미진진해할 수 있길. 오늘도 또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