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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되기까지

2024 연말 회고

by 쪼이



나는 매년 새해를 맞이하며 친한 친구들과 연말 회고 및 새해 목표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사실 목표라기보다는 그 시기에 가장 바라는 소망에 가깝다. 연등에 적어서 하늘로 띄워 보내는 그런 것 말이다. 그 새해 목표들은 1년 내내 잊혀져 있다가, 연말이 되면 다시금 들추어진다. 연말 회고를 쓰기 위해 2024를 시작하며 세웠던 내 새해 목표를 찾아보니 무려 연애, 신춘문예 입상(;;;), 퇴사였다. 결과적으로 셋 다 달성하지 못했다.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Action plan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결과다. 특히 연애와 신춘문예 입상은 나 혼자만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상호 간의 원만한 합의가 필요하므로(...) 쉽지 않다. 아무튼, 2024년을 시작하며 내가 소망했던 것 중 내 의지로 이뤄낼 수 있는 건 퇴사뿐이었던 셈이다.


그때는 퇴사 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2024년 초, 야심찬 새해 목표와 달리 당시의 나는 단단히 병들어 있었다. 퇴사하면 언제 할 계획이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의 질문에 순간 스친, 봄이 되기 전에 내가 죽어버릴까 봐 무섭다는 생각을 차마 입밖에 내진 못했다. 사실 그때의 새해 목표는 되는 대로 내뱉은 말들에 가깝다. 비록 지금 무망감에 휩싸여있더라도, 새해에는 대개 밝은 미래를 얘기해야 할 것만 같으니까 떠오르는 대로 고른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3월에는 결국 진단서를 끊고 병가를 냈다.


그렇게 맞이한 세 달의 휴식, 그중 한 달을 찬란한 발리에서 보내면서, 나는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괴롭히던 것들과 내가 소망하던 것들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로 어떤 것들을 좇으며 살고 싶은지에 대해.


그때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명료해진 것은 나의 정체성이었다.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모하던 일들이 비워진 자리에서 드러난 나는, 글 쓰고 읽고 먹고 웃고 떠들고 달리고 수영하고 공감하고 돕고 울고, 그 모든 행위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환경이었다. 대책 없는 퇴사로는 여유를 얻을 수 없다. 퇴사는 치열해질 각오가 있을 때 해야 한다. 일로써 이루고 싶은 것들보다 일 밖에서 즐기고 싶은 게 더 많은 나로서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 지금의 회사에서 다른 직무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는, 적성에 맞으면서도 동기 부여가 되는 일을 찾았고, 지금까지 그곳으로 부서를 이동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지난 반년 동안, 내 노력에 대한 응답은 없는 것 같았다. 윗분들은 다들 나를 일단 달래서 일을 시키기에 급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도 이해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틸 순 없었다. 퇴사 카드를 꺼내기까지 마음속으로 정해뒀던 데드라인이 바로 올해 말이었다. 올해가 지나기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다면 3월에 퇴사한다고 해야겠다, 몇 퍼센트나 진심일지 모를 생각을 하면서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끊어두었다.


그런데 3주 전, 갑자기 부서가 바뀌었다. 그간의 노력에 대한 응답인 것일까? 그렇다기엔 내가 가고 싶었던 부서가 아니라 엉뚱한 부서에 불시착해 버렸다. 기쁘기보다 화가 났다. 가뜩이나 기존 부서에 있을 때부터 감정이 안 좋던 부서였다. 현업에 대한 이해 없이 인력운용계획을 짜고 조직개편을 시행한 사측 부서였다. 기존 부서로부터 미움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퇴사에 한 발짝 더 떠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새 부서에서 3주를 보낸 지금, 나는 지금 이 일이 어쩌면 내가 바랐던 일일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다.


현 부서는 기존 부서를 관리하고 기획하는 조직으로, 현 부서의 주된 업무는 기존 부서에서 사용하는 시스템 개발과 기존 부서의 인력 관리다. 영문을 모른 채로 조직개편과 부서이동을 당하는 입장일 때는 이 부서의 업무 진행 방향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았지만, 실제로 이 부서의 일원으로서 그렇게 조직을 개편한 사유와 앞으로의 비전을 들어보니 납득이 되었다. 그 이유들이 현업에 충분히 전달이 안된 것이다. 왜? 그럴 의지가 없어서? 정보가 점점 전해지면서 각자의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열심히 해야 할 일이자 내가 이 부서로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 부서와 기존 부서 사이의 이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다. 의사소통을 충실히 하여 서로의 이해를 돕는 일은 내가 무척 잘하고 또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비효율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으로의 나의 일은 회사의 성장을 위해 조직을 개편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관리함과 동시에, 단순히 양적 성장뿐 아니라 부서원들의 커리어와 직무만족도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 재밌을 것 같고, 무엇보다 무척이나 보람찰 것 같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게 이상적으로 굴러가진 않을 것이다. 회사는 직원 개개인의 복지보다는 인건비 감소를 더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다. 당장 지난 3주 동안도 기존 부서의 상황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나와, 회사의 효율과 본인들의 성과를 우선시하는 부서장들의 입장차이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곧이곧대로 듣는 성격이라 솔직한 의견을 말하래서 솔직히 말했더니, 오답이었던 적도 많았다. 매 순간 압박면접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계속되는 논의와 타협과 굴복의 시간들마저도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지금 와서 돌아보면 다 재미있었다. 단순히 인력을 짜내기만 하는 건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장기적으로는 사람들이 보람차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회사에 이익이 되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힘들어본 사람이 힘든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나의 역할이 기존 부서 사람들을 비롯하여 회사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불안하면서도, 설렌다


2025년 목표를 새로 세워본다. 연애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고, 신춘문예는 순수문학의 꿈은 접었으므로 지워버렸다. 단지 지금처럼 어떤 형태로든 글을 꾸준히 쓰고, 그것으로 돈을 벌어서 프로라고 인정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회사일에 대해서는 어떤 목표를 세우면 좋을까. 몇 년 전, 2021년 새해 목표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하기’였다. 그 해 개고생하고 그다음 2022년 목표는 바로 ‘회사 일은 적당히 하기’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력을 잃고 수동적으로 일을 하던 몇 년을 보내고, 2025년을 맞아 다시 한번 목표를 세워본다.


다시 열심히 일하기



일에 몰입하는 재미를 느끼고, 그 결과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2025년 목표…, 바로 풀마라톤 나가기! 내 인생의 첫 풀마라톤은 내년 시카고 마라톤이 되었다. 마라톤에 한 달 월급을 태우게 생겼지만, 나는 그러기 위해 사는 것이다. 퇴사했으면 힘든 계획이었을 거란 생각에 퇴사 안 한 선택이 더 만족스럽다. 항상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항상 눈앞에 곧 보이는 즐거운 일들이 있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사는 것 같다. 1년 뒤에 시카고에 있을 나를 생각하며, 그리고 그전에 3월에 다시 만날 발리를 생각하며, 그전에 당장 주말의 약속과 퇴근 후의 휴식과, 그전에 지금 이 순간 마주치는 미소와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그런 것들이 다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1년이 지나 연말에 쓰는 이 회고에 행복하다고 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앞으로의 나도 계속 이렇게 고통스럽다가 행복하다가 어쨌든 평균적으로는 그럭저럭 즐겁게 살 거라고 믿는다.




++ 나의 2024년의 가장 애틋하고 찬란했던 기억들 여기에 담겨있다. 열심히 쓰고 기억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remember-mybail




+++ 그리고 오랜만에 들추어본 2024년을 시작하며 썼던 2023 연말 회고. 바라던 대로 새로운 내가 된 2024였던 것 같아서, 지난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2025년의 모든 순간도 소중하겠지!

https://brunch.co.kr/@zoey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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